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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드라마/시나리오 읽어주는 여자

[시나리오 읽어주는 여자] '혈의 누(2005)', 한국의 연쇄살인과 살인자의 마음


1. 한국의 연쇄살인

지지난 토요일에 “한국 살인사건의 유형분석”이란 주제로 황순일(경찰종합학교 수사학과) 교수님의 강의가 있어서 소재나 건져볼까 하는 욕심에 눈이 멀어 네오이마주 필진모임을 배신하고 충무로로 발길을 향했다.

우선 고대봉사건(1963년)이나 우범곤(1982년) 사건은 대표적인 연속살인 사건으로 피해자만 각각 6명과 56명이나 되었다. 이들 사건은 비교적 짧은 시간동안 이루어 지고 나름대로 살인 동기가 있었던 사건이다.

연쇄살인은 년대별로 대표적인 것을 사건일지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들을 수 있었다. 김대두사건(1970년대), 김선자사건(1980년대), 경기남부연쇄살인사건(일명 화성연쇄살인. 86년부터 10년간), 지존파사건(1990년대) 은 연쇄살인에 속하는 것으로 불특정 다수에게 뚜렷한 동기가 없이 가차 없이 일어났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연쇄살인이라고 부르려면 적어도 2건이상(미국은 3건으로 잡는다고 한다)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또한 개개의 사건 사이에 어느 정도 시간차(심리적 냉각기)가 있고 범죄수법은 늘 유사하지만은 않다고 한다. 범인은 가능한 흔적을 남기지 않지만 일부러 특별한 것을 남기기도 한다고 한다. 피해자와 안면이 없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고 한다.

수법이 제일 끔찍한 것은 김대두사건이었는데 거의 엽기호러영화와 비슷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임산부와 노약자를 위해서 방법은 설명하지 않겠다. 그리고 가장 많은 희생자가 어이 없이 죽은 것은 우범곤사건이었는데 아무래도 실탄을 가진 경찰이 이유 없이 비무장상태의 마을 사람을 해쳤기 때문이다.



2. ‘혈의 누’는 과연 연쇄살인인가

영화에서 드러나는 것은 연쇄살인의 형태를 취하는데 내용을 가만히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첫 번째, 살인자가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사건을 벌인게 아니기 때문이다. 죽어간 사람은 과거의 특정한 일에 연관이 되어있었기 때문에 이미 목표를 정하고 시작했다.

두 번째, 개별 사건이 띄엄띄엄 일어난 것은, 적절한 기회를 봐서 계속 사람을 죽인 것이지 범인이 흥분을 가라앉히고 심리적 냉각기를 가졌다고는 볼 수 없다.

세 번째, 섬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개별사건의 시간을 좀 더 단축해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우선은 이러한 세가지 이유로 난 이 영화에서 일어난 사건을 연쇄살인이라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한다.


3. <혈의 누> 사건일지


- 1808년, 섬 동화도
- 나흘간 효시, 육장, 도모지, 석형에 의해 4명 살해. 살인 미수 1건(거열)
- 방화 조사로 원규, 최차사, 장 호방 등 외부 수사 인원 투입하여 조사 중
  연쇄살인 발생. 수사 5일째 범인 생포에 실패. 본 사건관련자 2명 사망. 1명 자살.

- 독극물 검사로 용의자를 검거했으나 연이어 살인사건 발생
- 첫 번째 용의자의 죽음으로 강객주 사건을 조사하게 됨.
- 두 번째 용의자 추적중 범인의 단서를 잡고 마지막 범행지를 알아냄
- 범인은 검거중 사살당하고 두 번째 용의자는 마을사람들에게 집단린치를 당함


4. 시나리오의 아쉬움

사극과 스릴러의 조합. 전혀 안 어울리면서도 같이 있으면 재미있어지는 두 장르.

먼저 사극이란 장르적 측면에서 조사도 많이하고 군데군데 심혈을 기울인 흔적이 보인다. 다섯 가지 형벌이 잔인하기는 했지만 신선한 감이 있었고, 가내 수공업 수준으로 생각했던 진상품인 한지가 공장식으로 경영되었던 것이 놀랍기도 하고 흥미가 있었다.

볼거리란 측면에서 혹은 소재적인 측면에서 사극이란 장점은 잘 살렸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후자 스릴러적인 측면에서 보면 좀 아쉬운 면이 많이 있다. 스릴러의 주요 재미인, 범인을 알아가는 과정이 너무 쉽다. 가장 중요한 단서인 섬에서 일어났던 ‘강객주 일가 몰살’에 관해서도 사람의 입에서 술술 나오고 있는 것부터다 문제다. 이 영화가 사극이 아니었다면 얼마나 허술하게 느껴졌을 것인가. 영상은 흠잡을 데 없고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으나 역시 이야기 전개방식에 문제가 있다.


 1.프롤로그

밝은 달이 보인다.
이윽고 엷은 바람이 찰랑이면 하늘 위에서 가늘게 흔들리는 달빛.
비로소 물 속에서 바라보는 하늘임이 드러난다.
화면, 초조하게 흔들리는 달을 잠시 동안 바라보는데…….
순간 하얀 물거품을 만들며 화면 안으로 확! 떨어져 들어오는 한 여인의 얼굴!
산산이 조각나 버린 달빛을 뒤로 한 채 서서히 물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하는 여인.
작은 봇짐 하나를 품에 꼭 안고는 어두운 심연 속으로 사라져가는 여인의 창백한 얼굴…….

<FLASH BACK>

누군가에게 쫓겨 허억 헉-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필사의 힘을 다해 숲 속을 내달리는 여인.
사방을 감싸고 있는 나뭇가지들이 온 몸을 긁어대지만, 뒤돌아 볼 겨를도 없이 앞을 향해 달려간다.
필사의 힘을 다해 끝까지 내달리다가 한순간 우뚝, 제자리에 멈추어 서는 여인.
산의 가장 끝자락, 절벽에 당도해버린 것이다.
고개를 아래로 숙이면, 깎아지른 듯 높이 솟아 있는 절벽을 감싸고 있는 검은 바다가 보인다.
절망한 듯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고 마는 여인.
탕!
한순간 울려 퍼지는 총성.

<다시 고요한 물 속>

여인의 곱고 하얀 얼굴 어디에선가 붉은 기운이 번져 나오기 시작하고…….
심연으로 가라앉는 여인을 지나 붉은 기운의 흐름을 따라 서서히 부상하면…….
톡, 톡……. 수면에 떨어지고 있는 붉은 빗방울.
붉게 물들어버린 바다 위의 비.
물 속에서 피어오르는 붉은 피와 붉은 비가 얽혀 서서히 글자가 되어간다.

혈(血)의 누(淚)


읽으면서 대체로 느끼는 것은 시작부터 꽉차있다는 것이다. 스릴러란 장르를 생각하면 구성을 앞뒤가 딱딱 맞게 해야 영화가 되니까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하지만, 짐작하건데 구성이 너무 꽉꽉차서 나중에 이야기를 고칠 수 없게 되지 않았나 싶다.

첫 화면은 슬픈 느낌을 주며 잔인한 살인들 뒤에는 필시 곡절이 있을 것을 암시하고 있다.


14.당산나무 언덕 앞 (오후)

화면 가득 보이는 무원록의 시형도 몸의 각 부위를 표시해 놓은 인체 모형도.
시형도에는 앞면 쉰다섯 곳, 뒷면 스물  여섯 곳 등 모두 일흔 아홉 곳에 각 부분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있다.

안경을 쓰고 무원록을 바라보는 원규, 
상 위엔 김이 펄펄 오르는 조협수(소독제)가 사발에 담겨 있고,
망치, 물그릇, 소금, 식초, 밥, 술, 닭 등 응용법물(검시 도구)과 황종척(검험에 사용되는 자)이  놓여있다.
원규, 무원록을 덮는데 남 의원, 화첩을 손에 든 두호, 또 다른 두 명이 장막 안으로 들어온다.

장 호방
의원 남 가 입니다.
그리고 제지소에서 염료 일을 하는 두호라 하온데, 검시화를 그릴 것입니다.

원규에게 예를 취하는 의원과 두호, 두 사람(오작, 항인).

남 의원
(오작과 항인을 가리키고) 이 자들이 시장을 작성할 것입니다.
원규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럼 시작하게.

면을 조협수에 담갔다가 시체를 닦기 시작하는 오작.
항인은 황종척으로 시신의 죽창 찔린 부위 등을 재며 시장(검시기록)을 작성해 나간다.
두호는 종이에 시신의 상태를 세밀히 그리고
시형도를 토대로 시체를 관찰하기 시작하는 원규와 남 의원.

원규
피살자는 어떤 자였나?
장 호방(E)
장학수라는 자로 그 처가 병이 들어 오래 앓다가 죽었습니다. 오랜 병에 지극 정성으로 처를 구완하여 사람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하지만 그 처가 죽고 나서는 사람이 아주 달라져 하라는 일은 게을리 하면서 매일 투전판이나 기웃거리고 술에 취해 살아가던 자였습니다. 대동 굿을 하던 날도 선원들과 어울려 투전을 했다고 합니다.

오작과 항인이 항아리 속에 면을 넣어 술과 초로 적시더니 시신의 온 몸에 바른다.
시신의 몸 위에 천을 덮고는 다시 그 위에 면을 짜내 술과 초를 적시는 오작과 항인.
의원이 시신의 입을 억지로 벌리자, 원규가 탁자 위의 은비녀를 목구멍으로 밀어 넣는다.
종이를 뭉쳐 입 안으로 쑤셔 넣는 오작.

원규
피살자를 마지막으로 본 자가 누군지는 수소문해 보았나?
장 호방
예, 집에도 가지 않은 것 같고 선부장과 다툰 이후 만났다는 자가 없습니다.

잠시 후, 종이를 빼내고는 은비녀를 입에서 꺼내는 원규.
보면, 시커멓게 변해 있는 은비녀!
원규의 눈빛이 반짝인다.

이야기 흐름과는 무관하지만, 시체를 검시하는 장면에서 지적인 호기심이 일고 그 생경한 장면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느낌이 좋았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작가가 자료조사에 지쳐서 이야기 꾸미는 데까지는 정신을 못 쓴 듯도 싶다.

24.창고 안 (밤)

어둠 속에서 구석에 난 작은 창문을 통해 달빛이 들어오고 있는 창고 안.
소형 추(수갑)로 손이 뒤로 차여진 채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독기.
수척한 모습이지만 그 눈빛만은 매섭다.
철컹! 출입문이 열리더니 안으로 들어오는 호방.
입구를 살짝 살피고는 독기에게 다가간다.

독기
호장 어른!
장 호방
(나지막이) 내, 좀 전에야 자세히 들었다.
그 일 때문에 학수 놈을 없앤 것이냐?
독기
그 놈 입이 불안해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소.
장 호방
그러게 어쩌자고 너희들끼리 일을 치룬 거야?
그리고 죽은 놈한테 죽창은 왜 꽂았냐?
독기
술에 독을 탄 것은 나지만
(답답한 듯 나직이 분을 삼키며) 내가 왜 그 딴 짓을 했겠소?
장 호방
(불안해지는) 네가 꽂은 게 아니라고?
독기
(목소리 바르르 떨리며) 대동 굿 때 만신의 목소리 그건 분명 강 객주의 목소리였소.
거기다가 혈우를 보았다는 소문까지…….
(호방을 바라보며 다급히) 어서 이 섬에서 나가게 해 주시요!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소.
장 호방
잘 들어! 어차피 내일이면 감영으로 호송될 거다.
내가 감영의 아전들에게 손을 써서 무슨 수를 마련해 볼 테니 입조심해라.
감영에서 험한 꼴을 당하더라도 나를 믿고 절대 입을 열어선 안 될 것이야. 

자리에서 일어나 황급히 창고를 나가는 호방.
뭔가 궁리하는 듯 눈을 날카롭게 뜨고 이를 악무는 독기.

위 24씬에서보면, 장객주의 원한이라는 섬주민들의 동요에 대해서 적어도 이성을 가지고 있어야 했던 다섯사람 - 즉 연쇄적으로 살해당한 - 의 이야기가 여기부터 현실적이지 않다. 피해자들은 살인자를 찾으려고 노력했어야 했고, 섬을 빠져나가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런 영화의 몇몇 중요 전환점을 놓치면서 이야기가 단선적으로 흐르게 되었다.

36.허씨 집 마당

원규가 허 씨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대청에서는 허씨의 처와 아이들이 밥을 먹고 있다.

원규
강 객주 일가가 처형될 때 두호는 어땠나?
허 씨
글쎄요. 두호는 도통 보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 후로 벙어리처럼 말이 없어지고 그저 강 객주가 살던 집을 지키며 살 뿐입니다.

방에서 문을 탕탕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아이들에게 밥을 먹이던 허씨의 처가 방 안으로 들어간다.

원규
(방을 보며) 걱정이 많겠네.
허 씨
멀쩡하던 노인네가 강 객주 죽은 뒤로 정신을 놔버렸습니다.
원규
강 객주가 죽은 후? 왜? 강 객주 사건과 무슨 관계라도 있었던 건가?
허 씨
(놀라 손을 내 저으며) 아닙니다요. 나으리.
원규
그리 겁낼 거 없네. 그걸 따지자는 게 아니니까.
허 씨
(눈치를 살피며) 그런 게 아니옵니다. 소인의 아비가 객주 살아생전에 크게 덕을 입은 일이 있사온데 한을 품고 죽은 객주가 해코지 하는 거라고들 합니다.
허 서방
(문을 박차고 나오며) 야! 이놈들아! 혈우가 내렸어. 객주께서 오신다! 이런 천벌 받을 놈들아. (허공에 연신 절을 하며) 객주 어른 잘못했습니다. 객주 어른…….
허 씨
(벌떡 일어나며) 아이고 아버지. 왜 또 그러슈. 왜 또-

허 서방과 허 씨의 실랑이가 계속되고……. 가만히 일어나 마당을 나서는 원규

원규가 조사하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강객주 사건이었다. 사실 이것은 적절하지 않은 조치일 수도 있다. 범인은 강객주 사건을 조사하길 바랬고 수사는 충실히 범인의 의도대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강객주 일가 모함 사건’의 복수를 가장한 다른 범행일 수도 있었는데 수사 초기부터 혈우니 뭐니 하면서 섬의 분위기에 휩싸인 것은 방법이 좋지 않다. 다행히 진짜로 범인이 그 사건의 복수자라니 말 다했지만. 범인이 위 씬의 허사방이나 허씨였다면 혹은 처음에 잡혀온 독기였다면 어땠을까?

45.인권 처소 방 안 (아침)

높이 솟은 전각 마루에 서로 마주보고 앉아있는 원규와 인권.
‘경염정(景濂亭)이라는 편액이 걸려있고 기둥마다 주렴이 걸려있다.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마당은 아늑하고 잘 만들어진 아름다운 연못에는 연꽃이 피었다.
수박에서 떨어지는 맑은 물은 소리도 청명하다.

< 第 四 日 >

다탁을 내려놓고는 다기와 다반을 정성스레 상 위에 올리는 계집 종.
낡았으나 정갈하고 품위 있는 물건들이다.
다기에 차를 따른 뒤 공손히 인사를 올린 후 방을 나가는 여종.
한쪽의 벽을 가득 메우고 있는 잘 정리된 책들을 둘러보는 원규.
책장에 기대어있는 거문고가 인상적이다.

...(중략)...

인권
나으리의 선친께서 내셨던 문제, 제가 그 답을 모른다고 생각하십니까?
지주는 한 섬도 가져가서는 안 되겠지요.
원규
그렇습니다.
흉년이 들어 모두 굶어 죽을 판일 테니 지주는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인권
(비웃 듯 바라보다) 하지만 난.  (순간 표정 매서워지고)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그런 자비를 베푼다면 그 다음 흉년엔 곳간까지 열어달라고 할겁니다. 강한 자에겐 한 없이 비굴하고, 강한 자가 빈틈을 보이면 그 골수까지 파먹으려 드는 것이 저들의 마음이지요.
원규
인심은 위험한 것이라 과불급이 없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동요하고 있을 때 몰아세운다면 민심을 수습하기 어려워질 겁니다.
인권
뭍의 방식으로 모든 걸 판단하지 마십시오. 조공이 늦어지면 문책을 당하는 건 제지소의 주인인 영감이십니다. (부적 뭉치를 꺼내 놓으며) 일을 못하겠다고 버티던 자들이 제지소에 붙이려던 겁니다. 귀신이 두려워 무당에게나 몰려다니는 무지한 것들을 예로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
원규
(지지 않으려는) 범인을 잡으면 주민들의 동요도 가라앉을 것입니다.
인권
(비웃듯) 다섯 모두 죽을 때까지 기다리란 말입니까?
원규
(자존심이 상한 듯 미간을 찡그리고)  …….
인권
(잠시 표정 누그러뜨리고 다시 예의를 깍듯이 갖춰) 제지소의 초지공들은 제 방법대로 다스릴 테니 나으리께서는 그만 범인을 찾는데 매진하시지요.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

범인은 죽은 애인에 대한 원한으로 사람들을 하나씩 처단하면서 이곳 섬마을의 인심( 강한자에게 비굴하고 약해진 자의 골수까지 파먹는다 )이 나쁘기 때문이라고 자기 변명을 한다. 영화는 아래씬처럼 그의 변명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정말 말도 안되는 클라이막스를 맞는데 정말 끔찍하다.

103.제지소 앞

검은 구름 탓에 칠흑같이 어두워진 제지소 앞.
사령들, 목 뒤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홍사령을 업고 나온다.
그 뒤를 이어, 두호를 부축해 밖으로 끌고 나오는 사령들.
눈물을 흘리듯 제지소 벽의 나무 결 사이로 피가 흐르기 시작한다.
원규가 제지소 밖으로 걸어 나가자,
제지소를 빙- 둘러싼 채 서서히 모습을 나타내는 마을 사람들.
손에는 낫이나 칼 등의 흉기가 들려 있다!
위기감을 느끼고 칼을 빼어드는 사령들, 사람들을 막아서는데,
자리에 멈춰 서서 두호를 주시하고 있는 마을 사람들의 눈동자.

원규
(무섭게 외치는) 뭣들 하는 짓인가! 물러서라!
촌로
나으리……. 두호를 저희들에게 넘겨주십시오.
두호가 죽어야 객주의 원혼이 분노를 가라앉힐 겁니다.
원규
(얼굴 무섭게 일그러지고) 이 자가 죽는다고 모든 것이 용서될 거라 생각하나?
너희들도 이 자와 다를 것이 없다!
(분노하는) 정작 객주가 모함을 받았을 때는 돈 몇 푼 때문에 외면했던 자들이 이제
다른 이의 피로 용서를 구하려 드는구나.
어서 길을 터라!

수발총을 그들에게 겨누는 원규.
흉기를 손에 쥔 채 살기 띈 눈빛으로 다가오는 주민들.
분노한 얼굴로 무리를 겨누고 있는 원규의 총 끝이 가늘게 떨려오고…….
그런 원규의 얼굴 위로 인권의 소리가 들린다.

인권(E)
쏴라! 네 손에 내 피를 묻혀라.
그러면 네 애비가 그랬듯이 앞으로 그 손에 더 많은 자의 피가 묻을 것이다.
촌로
나으리……. 두호를 저희에게 내 주시오.

원규가 망설이는 사이 사령들에게 쌓여있던 두호가 서서히 고개를 든다.
사령들을 밀어내고 주민들 앞으로 나서는 두호.
두호를 끌어내리는 사람들.
사령들이 막아 보려 하지만 수적으로 열세인데다 광기에 쌓인 주민들에게 밀려나기만 한다.
쑥- 두호의 몸에 칼을 꽂는 허씨.
이내 사방에서 두호에게 달려드는 주민들.
낫과…… 죽창과…… 칼과…… 온갖 흉기들을 닥치는 대로 꽂아댄다.
그들의 손에 피를 묻힌다.
온 몸이 피로 범벅이 되어서는 계속 두호를 난자하는 사람들…….
외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울컥 피를 토하는 두호.
두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하늘로 솟았다가 비처럼 쏟아진다.
톡, 원규의 옷자락에 떨어지는 붉은 피.
툭 툭, 사람들의 얼굴 위로.
툭 툭 툭, 사령들의 옷자락에도 붉은 기운이 스며들고.
원규, 놀란 눈으로 하늘을 보면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는 붉은 피!
마치 화폭에 붉은 물감이 뿌려지듯 서서히 붉게 채색돼 가는 사람들의 모습.
넋이 나가서 서 있는 원규와 광기와 공포에 빠져 있는 사람들…….
더 이상 볼 수 없는 듯, 고개를 돌리는 원규.


5. 살인자의 마음

영화에서는 잔인한 방법으로 살인이 자행되고 있다. 이부분에 대해서는 예술적인 살인을 기대하는 작가나 감독 등등을 제외하고 살인자 자신을 생각해 보자.

김대두사건의 경우 범인이 체격이 작아 희생자의 반격우려가 있어 죽일 때 확실하게 처리한다는 것이 수법이 점점 잔인해지고 스타일화 되었다고 한다. 경기남부 연쇄살인의 경우 아직 범인이 잡히지 않았지만 그 잔인한 살인행각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살인자들과의 인터뷰’란 책에서는 잔인하고 엽기적인 살인은 인간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한다. 살인이 미친놈들이나 저지르는 것이 아닌, 이기적인 이유이든 혹은 유희적인 살인이든 개인적인 복수든 스타가 되고 싶은 욕망이든 그들이 인간의 마음을 아직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니.

물론 저자는 짐승들은 그런식으로 살인을 저지르지 않고,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들이 저지른다는 측면에서 발언을 한 것이다.

살인자도 ‘인간의 마음’을 가졌다니. 정말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부분이다.

각본: 이원재 / 감독: 김대승



** 이글은 제가 온라인 영화비평 네오이마주 [시나리오 읽어주는 여자] 칼럼에 2006년2월에 게재한 바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