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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드라마/시나리오 읽어주는 여자

[시나리오 읽어주는 여자] '연애의 목적', 대사는 적게 해다라는 주문에 대해서


젖었어요?’

 

처음 시나리오를 봤을 때 인상이 정말 잊혀지지 않는다.

 

2003년에 본 연애의 목적의 줄거리는 전혀 생각 안나고 끝이 굉장히 슬펐다는 기억만 남은채로 영화를 봤었다. 그리고 이야기가 좀 정치적(?)으로 변해서 당황했다. 그래도 첫 씬은 똑같구나. ‘젖었어요가 명대사는 아니지만 영화시작하고 처음하기에는 좀 거북스런 말은 틀림없다. 고윤희 작가는 이 작품으로 데뷔를 했는데 그 다음 영화는 어떻게 되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 작품이 머리를 빡빡 밀고 집안에서 틀어박혀서 쓴 것이라는 소문이 있는데 믿거나 말거나.

 

시나리오를 쓰다보면 특히 공동작업주체가 작가가 아닌 기획팀이나 감독일 때, 처음에 분명히 못을 박는 한마디 주문이 있다.

 

대사로 풀어가는 건 싫다

 

아마도 작가가 대사 나부랭이나 쓰는 인간이라는 편견이 강하게 그들 뇌리에 남아있나 보다. 사실 시나리오에서 작가들이 제일 공을 들이는 부분은 구성이라고 생각했는데, 듣고 보면 그것도 가만히 곱씹어 보면 상당히 괘씸하다. 대사는 그냥 옵션인가?

 

다시 영화로 돌아가 교생 최홍과 같은 반 담임선생 이유림을 살펴보면 이유림이 말발로 계속 여자를 꼬시려는 것을 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대사가 특히 이유림이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져 내릴 때 보면 분명히 과잉대사다. 아무리 캐릭터라지만 계속 영화의 긴장감을 낮추고 있다. 그렇다고 다른 식의 대사를 같이 동급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가령 첫 씬에서 둘이 가만히 벤치에 앉아 얼굴이나 쳐다본다고 치자. 당연히 그런 씬이었다면 당장 삭제가 되었을 것이다. 물론 라디오 방송처럼 계속 대사를 읊어댈 필요는 없겠으나 배우 연기 못지않게 대사가 중요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영화를 다시보고 나서 처음 슬펐던 버전의 시나리오가 보고 싶어졌다. 조금은 덜 다듬어진 재료를 찾아 책상을 뒤졌다. 다행히 프린트된 당선버전 시나리오가 아직도 있었다(이하 원본). 자주 들르는 카페에 가보니 영화 최종고도 올라와 있다.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어떻게 달라진 건지.

 



S21#. 로바다야끼()

...중략...

민망한 듯 수줍게 웃는 홍. 하지만 계속 조개에서 손을 떼지 못한다

유림 남자친구랑 섹스하죠?

당황하는 홍의 표정. 술을 한 모금 마신 후, 애써 미소를 띠며

 

그냥 뭐..사귀면 스킨쉽 정도는 다 하지 않나요? 이선생님은요?

유림 한지... 한 두달 됐나..더 됐나? ... 6년 만나니까

별로 만지고 싶은 마음이 없죠.

(놀라는 듯) 6년요? ... 여자친구 사랑하세요?

유림 (당연한 듯) (잠시 생각하다가) 그냥.. 자식 같고 부모 같아요..

....

 

 

이 장면에서 이유림이 끈질기게 말로 최홍을 꼬시느라 벌써 종이 4장을 넘어간다. 사실 초보자들이 대사에서 문제시 되는 건 대사의 생략이다. 그 씬안에서 끝장을 보지 못하고 넘어가고 넘어 가고... 이 부분은 좀 길었지만 할 일을 다하고 다음으로 넘어갔다는 점에서 칭찬해주고 싶다. 영화내에서 이유림이 계속 최홍에게 집적대는데 그중에서 끈질긴 그의 캐릭터를 보여주는 곳이 3군데가 있다.

 

1.이 로바다야끼 장면에서 자자고 조르는 장면과

2.수학여행에서 거의 성추행에 가깝게 옷부터 벗기고 5초만 넣고 있겠다고 할 때와

3.나중에 소각장에서 여관에 가자고 꼬실 때다.

 

소각장에서는 유림의 말 많고 자기 합리화에 강하고 얍쌀한 성격이 그대로 드러난다. 진짜 말 많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다. 원본 시나리오에는 소각장에서 여관으로 직행한 남녀의 대화가 극장용으로는 좀 부적합해서 자진 삭제를 한 듯싶다. 그래도 그 대화보다 첫 씬이 강하게 남은 걸 보면 참 이상하지.

 

 

S# 51. 여관 ()

...중략...

눈을 지긋이 감는 유림.유림의 웃옷을 집어드는 홍

유림 뭐야?

빨아달라면서요

하고 유림의 옷을 보여주는 홍. 홍이 생리중이었던 듯 옷에 피가 묻어 있다.

유림 그거였어? 에이 거말고 딴 거 빨아 줘

뭐요?

유림 자지

(깜짝 놀라며) 미쳤어요? 그걸 어떻게 빨아요?

유림 칫 웃기고 있어 남자친구꺼 빨아봤잖아

안 빨아봤는데요

유림 거짓말하지마

정말인데요

유림 그럼 남자친구랑은 어떻게 해?

이불 쓰고,,, 그냥 누워서 해요

유림 체위는?

난 아래에 남자친구는 위에

유림 다른거는

다른 건 해본 적 없어요

유림 거짓말.

정말이에요

 

 

원본과 최종고의 이야기가 갈리는 부분은 원본 65씬 부터다. 서로 잘 생각도 없었는데 아침에 눈을 뜨니 여관이었더라 하고 최홍이 이 선생님이 저 강간한 거에요하며 화를 낼 때부터다.

 

원본에서는 이유림이 부모 같고 자식같았던 애인과 결혼하고 최홍과 결별하는 현실적인 결말을 택했다. 원본이 슬펐다는 기억을 찾아보니 최홍의 의사 애인이 자살했다는 장면이 있다. 그랬구나 그랬었구나.

 

영상화 되면서 최홍이 학교에서 걸레라는 소문으로 다시 사랑에 대한 배신과 아픔의 절차를 똑같이 밟게 되는 순간 가해자가 또다시 연인인 것은 이야기를 잘 바꾼 것 같다. 그전처럼 자기가 쫓아다녔다는 식의 결말에 대해서 성추행으로 연인을 몰고 간 결말이 영화를 다 본 후에 씁쓸함으로 남는다. 그 씁쓸함이 원작에 비해서 좀 더 성숙한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새 시나리오에서, 성추행으로 파문되는 클라이막스와 마지막으로 최홍이 이유림에게 찾아가 거꾸로 작업을 하는 장면이 마음에 든다. 이들의 긴 대사(?)를 끝으로 들어보자.


 

120. 거리 ()

...중략...

유림 ! 니가 어떻게 날 찾아 올 수 있냐? .. 니가 인간이냐?

(진심으로) .. 좋아하니까. 너 보고 싶어서 찾아왔지.

유림 (어이없어서) 나쁜 년 넌 진짜 나쁜 년이야. 좆 같은 년.

너 같은 년은 진짜 이 아스팔트에다가 얼굴을 갈아버려야 돼.

내 마음 같아선 널 목 졸라 죽이고 싶지만

내 손이 더러워 질까봐 참는다.

 

홍의 팔을 확 쳐버리고 일어나 가는 유림.

그런 유림을 바라보는 홍의 얼굴.

 

(CUT TO)

- 어느 건물 계단

화려한 쇼윈도우 장식이 들어선, 어느 건물 계단 앞에 나란히 앉은 홍과 유림.

유림은 홍을 떼어내길 포기했는지, 지친 듯 앉아 있고, 홍은 또 유림이 도망이라도 갈까봐 유림의 팔을 꽉- 안듯이 잡고 있다, 머리를 유림에게 기대는 홍.

 

감정이 북받치는 지 더욱 서럽게 흐느끼며 어깨를 들썩이는 유림.

 

유림 너 한번 말해봐.

내가 너 좋아한 죄밖에 더 있냐?

-.. 내가 너 좋아한 죄로 이렇게 되냐?

내가 무슨 잘못했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날 가지고 놀았냐?

나도 너 좋아했어. 나도 너 진짜 좋아했어.

유림 -. 니 거짓말 인제 안 속아.. 니가 인간이냐? ?

어떻게 좋아하는 사람한테 그럴 수 있냐?

 

유림의 눈물을 스윽- 닦아주는 홍.

 

같이 잘래?

유림 (어이없는) 미친년 돌았냐?

같이 자자. 같이 자고 싶어.

유림 너 진심으로 말하는 데 나 이젠 너한테 안 속아.

너 이후론 여자 믿을 수도 없고, 무서워서 여자 사귀지도 못 해.

너가 날 이렇게 만들어 놨어.

그러니까 내가 책임질께..

유림 더 이상 나 가지고 놀 생각 마. 난 오늘 이후로 너 절대 안 만나.

길에서 만나도 아는 척 하지 마. 아는 척하면 때려죽일 거야.

내 눈에 남자로 보이는 건 너뿐이야.

유림 좃까 씨-.. 널 죽일 거야.

너한테 꼭 복수하고 말거야.

 

술에 취한 유림에게 더욱 기대는 홍. 문득, 눈에 눈물이 고이는 홍이다.

 

.. 이젠 잠 잘자... 너 없이두. 서울에 와서 몇 년 만인지 몰라.

유림 (갑자기 삐져서는) . 잘됐네. 이젠 진짜 나 필요 없겠네.

그니까 이거 놔. 이거 놓라구. 잠도 잘 잔다며. ? 노라구!

 

유림의 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유림의 팔을 잡고 있는 홍. 눈엔 눈물이 고이지만,

입가엔 기쁘고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그래서... 고마워.

 

천천히 홍의 미소로 다가가는 카메라.

둘은 이후에 같이 잤는지, 앞으로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홍의 미소에서, 홍의 상처는 어느 정도 치유가 되었음이 느껴진다.

그건 아주 밝고 행복해 보이는 미소다.

그 미소 위로 빠르고 경쾌한 음악이 흐르며 빠르게 암전된다.

 


 ** 이글은 제가 온라인 영화비평 네오이마주 [시나리오 읽어주는 여자] 칼럼에 2005년12월에 게재한 바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