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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드라마/시나리오 읽어주는 여자

[시나리오 읽어주는 여자] '번지점프를 하다', 그래도 고은님이 그립다.


1. 오르가즘 


신경숙의 ‘풍금이 있던 자리’를 읽다가 그 향기에 취해 가슴이 붕 뜨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이걸 오르가즘이라고 해도 좋을까. 

그 단편을 읽는 동안은 적어도 가슴이 환해졌었다. 시나리오를 읽다가 오르가즘 -- 물론 야한 영화를 논하는 게 아니다 -- 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 오르가즘은 커녕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는 것도 곤혹이다. 개봉된 영화들은 그래도 낫다. 끝까지 읽기 쉽지 않은 것일수록 본인은 예술이라고 생각하니 뭐라 할 말도 없다. 

 사실 끝내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은 시나리오는 존재할 이유가 없다. 집으로 지어지지 않은 설계도가 아무 의미도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래도 어떤 것들은 가치있어 보이기도 한다. 오늘 말하는 ‘번지점프를 하다’가 그런 시나리오다. 그럼 내가 이 시나리오를 보고 오르가즘을 느꼈는가? 물론 대답은 NO. 그러나 다음번은 느낄 거라 기대하고 있다. 


2. 맨 얼굴로 이야기하기 

동성애를 다루고 있지만 그것이 이성간의 사랑과 크게 다르지 않게 표현되고, 사랑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거부감 없이 예쁜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감정이입이 되었던 것 같다. 

평범하다 못해서 어떤 장면들은 흔해빠진 누구나 겪었을 법한 일들을 다루고 있다. 게다가 대사들은 얼마나 느끼하게 여겨지는지 ...  

그래서 이 시나리오가 이쁘다. 정직하고 담백하다고 느껴진다. 

그 원인은 필경 기발한 영화를 만들려는 욕심에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하도 주물럭 거려서 이상해져버린 이야기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고은님의 시나리오를 다시 생각해보면 줄거리나 내러티브 면에서 특별한 구석은 찾기 힘들다. 그 속에서 오히려 흥미로운 것은, 글 전체를 관통하는 살아있는 감정의 재생이며 느낌이다.

 

S#33. 2-5 (그날 오후)


인우, 현빈을 주시한다.
나도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하는 얼굴.

조재일
(시비조)근데?

현빈
근데 사랑은 그렇게 순간적으로 풍덩 빠지는게 아니구,
‘그 사람’을 알아보는거야- 
드디어 임자 만나는거지-

아이들, 오오~~ 하며 현빈을 돌아보고,
조재일은 삐지고, 인우는 현빈을 주목한다.

현빈
(장난기)어혜주랑 나처럼-

아이들, 장난기 어린 야유를 보내고,
현빈 앞의 아이들은 책 등으로 현빈을 내려치고,
조재일은 입술을 실룩거리고,
인우는 현빈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33씬에서 인우는 처음으로 죽은 연인을 다시 기억하게 된다. 

‘그 사람을 알아보는 거야’란 낯 간지런 대사가 나오면서 잠시 거부감도 일지만 인우가 현빈을 알아보게(?)된 당혹감을 같이 느끼면서 관객이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따라가게 된다. 

‘나 어디안가 ... 나 그대로 있을게’ 같은 빈정 상하는 대사가 수 없이 난무하지만 정말로 좋아하는 상대가 그런다면 참아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S#74. 2-5 교실 

인우, 돌아서서 칠판에 판서 중. 
인우,판서 내용 중에 막 ‘..숟가락..(혹은 젓가락)’이란 단어를 쓰고 났을 때다.

현빈
(뒤에서)
선생님, 젓가락은 ㅅ받침인데 숟가락은 왜 ‘ㄷ’ 받침입니까-?

엉뚱한 질문에 아이들은 힘도 없이 헤- 웃는데
인우 얼굴이 순간 돌처럼 굳으며
분필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딱-!” 소리를 내며 두동강 난다.
생각 없이 헤헤- 웃던 아이들, 깜짝 놀라고.
인우,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돌아보지도 못하는 채로.

인우
..누구야...?



3. 소재주의 

젊은 작가일수록 소재주의에 쉽게 유혹을 당한다. 

번지점프도 그 비판을 빗겨가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 다시 생각해 보면 그렇다고 소재를 정확하게 다룬 것도 아니다. 동성애를 다루지만 그 부분은 현실적이지 못하다. 남자끼리 사랑할 때는 흠... 아무래도 섹스를 빼고 말하기 어렵다. 

잠시 사랑이야기에 동성애코드를 차용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작품 안선영의 ‘클럽 버터플라이’란 시나리오는 ‘부부 스와핑’이란 소재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몇 년전에 이 지루한 이야기를 끝까지 읽다가 끝부분이 재미있어서 정말 다행이란 생각을 했었다. 다시 읽어보니 재미있지만 역시 영화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번지점프를 하다’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클럽 버터플라이’가 생각날 게 뭐람. 아마도 전자는 영화적이고 후자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는 ... 

4. 그래도 고은님이 그립다 

이 영화는 정말로 재미없을 것 같아서 미루고 미루다가 시나리오를 보고 재미있어서 본 기억이 있다. 

머릿속으로 그려본 영화랑 실제 화면이랑 확연히 다르기 때문인지 생각보다 못하다는 느낌이다. 어쨌거나 약간은 순정만화 같은 이야기를 잘 가라앉힌 것 같다. ‘번지점프를 하다’를 마치고 ‘아 유 레디’란 영화를 썼다는데... 참담한 평에 볼 엄두가 안나는 영화다. TV 드라마로 가서 영영 영화 접은 것 아닐까 살짝 걱정이 된다. 시나리오 후반에 과거와 현재의 교차점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절묘하게 겹치는 장면이 무척 좋았는데 그 부분을 보며, 고은님을 소환할까 한다. -- 이 부분 역시 영화에서는 판타지를 거의 제거했는데,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면 다행이지 싶다 --

 
S#112. 용산역 앞 (현재와 과거 교차 편집)

캄캄해졌다.
건너편으로 용산역이 보이는 건널목 앞.
몰골이 말이 아닌 현빈이 이를 악물고 자전거를 몰고 오고 있다.
신호등의 파란 불이 깜박깜박 점멸하자
현빈이 속도를 내며 건너려는데 대형 화물차 한 대가 달려온다.
급하게 서는 현빈. 현빈 코 앞으로 굉음을 내며 지나가는 화물차.

17년 전 겨울 어슴프레한 새벽.
같은 곳. 비보호 건널목.
급하게 달려와 좌우를 살피며 길을 건너려는 여자.

현재.
신호가 파란 불로 바뀐다.
바뀌자마자 빠르게 달려 나가는 현빈.
순간 신호를 어긴 자동차가 한 대가 현빈을 향해 질주해 온다.

17년 전.
급하게 길을 건너던 여자.
질주해 오는 자동차.
미처 피하지 못하고 자동차를 보는 여자는, 태희.

다시 현재.
질주해 오는 자동차가 현빈 자전거 바로 앞에서 아슬아슬 요란하게 급정차-
현빈, 안도할 틈도 없이 그대로 길을 건너간다.


** 이글은 제가 온라인 영화비평 네오이마주 [시나리오 읽어주는 여자] 칼럼에 2005년12월에 게재한 바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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