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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드라마/시나리오 읽어주는 여자

[시나리오 읽어주는 여자]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하여튼 다르다.


1. 하여튼 다르다. 

지금 와서 하는 얘기지만, 난 극장에서 ‘돼지가 우물에 빠진날’ 영화를 보다가 중간에 나간 적이 있다. -그 이전에도, 그 이후로도 그런 실례는 다시 저지르지 않았다-  

송파 신사거리를 올라가면 엄마손 백화점에 싸구려 삼류극장이 있었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여름이었다. 에어콘이 고장 났던가... 그 좁은 극장 안의 땀내로 가득하고 찝찔한 느낌은 영화 그대로였다. 게다가 옆자리의 군대 휴가를 나온 비호감인 남자친구랑 날아다니는 파리... 이 모든 것이 하나가 되어서 그 영화를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 영화를 다시 보는 것은 96년도에 개봉한 영화를 새삼 다시 씹으려거나 이미 답안이 나와있는 영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는 것은 아니다. 미리 밝히자면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시나리오 작가 네 명 --정대성, 여혜영, 김알아, 서신혜-- 중 한 명이 필자의 스승이다. 

개인적으로 좋아하거나 재미있게 본 영화도 아니고, 시나리오에 대해 말하자면 습작생들에게 전혀 권하고 싶지 않은 스타일이다. 게다가 영화 이후로 감독은 뜨고, 네 명의 시나리오 작가와 네명의 주연배우의 삶은 정말 영화처럼 좆 같아져버렸다. 

이 영화는 같은 시기에 개봉한 한국영화와도 다르고, 그 이전의 한국영화와도 다르다. 물론 같은 감독의 다른 작품과 비슷한 점은 있지만, 그 이후의 한국영화와도 다르다. 1996에서 97년사이 한국영화 개봉작을 보면 은행나무침대, 투캅스2, 피아노맨, 지독한 사랑, 고스트맘마, 박봉건가출사건, 초록물고기, 비트, 할렐루야, 넘버3, 편지, 노는계집 창, 접속 등이 있다. 위 개봉작들은 전혀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과 같은 시기, 같은 나라에서 만들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들이다. 

내가 비평가가 아니라서 정확히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짚을 수가 없다. 하지만 동시대 작품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은 확실하다. 10년의 간격이 있지만 지금보아도 전혀 촌스럽지 않은 영화다. 영화가 시대를 조금 앞서간 면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개봉한다고 해서 관객들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도 아니다. 


2. 그래도 비웃지 말았으면 좋겠다. 

네 명의 작가가 인물 한명씩의 이야기를 구성했다는데, 누가 설명해 주지 않아도 두 번째로 영화를 볼 때는 투시된 캐릭터를 보고서 필자의 스승이 누구를 맡았는지 알아챘다. 그래서 피식 웃으며 혼자 영화를 봤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아마 이런 시나리오가 있다면 누구도 영화로 만들겠다고 나서지 않을 것이다. 이 시나리오는 정말로 영화화되지 않았다면 정말 뭣도 아닌 것이 될뻔했다.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네 명의 캐릭터들이 차례로 한명씩 자조적으로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각자의 삶에 있어서 나름대로 진지하고 진정성이라는 게 있었다. 내가 슬프게 생각한 것은 이런 각자의 이야기가 카메라를 통해서 보여졌을 때 또 한번 그것을 비틀여져 정말로 캐릭터들이 우습게 되어버렸다는 데 있다. 

이야기는 소설가 효섭, 효섭의 애인의 남편 동우, 효섭을 짝사랑하는 민재, 효섭의 애인 보경의 시점으로 차례로 진행되는데 마치 옴니버스 영화와 같은 구성을 지닌다. 주인공 효섭부터 시작되어 차례로 어떻게 비웃음 당하는지 한번 살펴보자.

S#27. 카운터 앞

 (담배를 빼물고 화장실에서 나오는 효섭,  옷이 붉게 얼룩졌다. 방안에선 시끌시끌한 웃음소리 들린다. 효섭, 얼굴 찡그리며 카운터로 가서 전화 수화기를 든다.)


    효 섭   (수화기 든 채로) 손님 중에 서민재씨 부탁합니다.

            (수화기를 들고 서있는 효섭 앞을 아까 짬뽕국물을 엎은 보이가 

             지나간다)

    효 섭   이봐요!

   웨이터   (긴 앞머리를 혼들며 건성으로) 죄송합니다.  

              (하고는 방으로 들어가려 한다)

    효 섭   너, 그게 죄송한 사람의 태도야?

   웨이터   바쁘니까 그렇죠.

    효 섭   (전화기에 대고) 없습니까? 알았습니다.

   지배인   (다가오며) 무슨 일이야? (효섭보고 웃으며) 불편한 일이라도..?

    효 섭   도대체 종업원교육을 어떻게 시키는거요?

   지배인   무슨...?

    효 섭   (젖은 옷을 보이며) 이거 보여요?

   지배인   (알아차리고) 아! 죄송합니다.(금고에서 만원 꺼내며) 

              세탁하셔야 겠네요.

    효 섭   내가 지금 만원땜에 이러는 줄 알아요?

   지배인   (계산원에게 짜증부리듯) 야, 한장 더 꺼내.


 (계산원 부은 얼굴로 만원 더 꺼낸다.효섭,기분이 팍 상해 지배인을 노려보며)


    효 섭   (웨이터를 뻔히 보며) 돈은 필요 없으니까, 지금당장 이 옷 

              아까처럼 해 주세요.

   지배인   손님,저희가 지금 영업중이니까......,

    효 섭   그게 내 옷하고 무슨 상관입니까? 난 이옷 입고는 아무데도 

             못가니까, 원상태로 해주세요.


 (효섭, 사람들 앞에서 웃옷을 벗는다.  이때 방안에선 무슨 일인가하고 사람들이 고개를 내민다. 그 중 후배, 신발을 꿰차고 나온다.)


    후 배   선배님!


 (효섭, 런닝도 벗으려 한다)


    후 배   (효섭의 팔을 붙들며) 지금 뭐 하시는거에요?

    효 섭   넌 빠져.(런닝을 벗는다)

    후 배   옷입으세요.


 (어느 사이 나온 변상구, 앞으로 나서며)


   변상구   내버려 둬. (차가운 눈빛으로 효섭을 보며) 벗어, 벗고 싶음 

              아예 다 벗어!

 (갑작스런 변상구의 충동질에 얼굴이 굳는 효섭.) 


영화에서는 효섭이 소설이나 쓴답시고 못되먹은 치기나 가지고 사는 가부장적이고 비굴한 남자로 나온다. 특히 위 장면 #27씬에서는 호기를 부려 다른 약자에게 화풀이 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시나리오에서는 효섭이 왜 화를 내는지 적어도 설명이 되어 있다. 초반의 일련의 시퀀스에서 효섭은 그의 자존심이 짓밟힌다. 두 번째 인물 동우를 우습게 보는 장면은 아래 #76씬이다. 여기서 동우는 그의 결백증적인 청결함이 조롱당한다.

S#76. 동 장소 -- 방 안

...중략...

    레 지   어땠어요?

    동 우   좋았어...

            (하며 레지를 꼬옥 껴안는다. 레지도 한번 건성으로 안고는

            옷을 입기 시작한다.)

    동 우   허탈한 표정으로 콘돔을 벗기다가 문득 경악하는 얼굴된다.

    동 우   이거 ...!

    레 지   왜요?

            (동우, 어쩔줄 몰라하며 급히 화장실로 달려간다.  물 트는

            소리, 몸을 씻는 소리. 잠시 후 화장실에서 하얀 얼굴이 되

            서 나오는 동우.)

    동 우   (화를 참으며) 콘돔이 찢어졌어! 쓰던거 가져온 거야?

    레 지   (화를 벌컥내며) 미쳤어요?

    동 우   그럼 이게 왜 찢어져요?

    레 지   (팬티 위에 치마를 올리며) 내가 어떻게 알아요. 내가 만든

            것도 아닌데, 하여간 우리나라 것들은 알아줘야 돼.  좀 튼

            튼하게 만들면 어디가 덧나나. 돈이나 줘요. 3만원.

    동 우   (잠시 망설이다) 혹시 최근에 검사 받았어요?

    레 지   (블라우스 단추를 채우며) 무슨 검사?

    동 우   그러니까... 그...

    레 지   (순간 기분이 확 상해) 흥.  그런거 무서운 사람이  가만히

            잠이나 자지 왜 불러! (비웃는 듯이) 원래 쾌락은 위험 부담

            이 좀 있는거에요. 빨리 돈 줘요.

    동 우   (하얗게 질려 창녀의 팔을 잡고) 검사 받았어, 안 받았어?

    레 지   우린 불법이라 의료보험도 안되요.

    동 우   그냥 말해! 괜찮아, 아냐?

    레 지   이거 놔요. 말년에 검사는, 무슨 검사야. 그냥 이짓하다 죽

            으면 되지. 그렇게 걱정되면 당신이나 병원 가봐요 난 이렇

            게 살다가 죽을테니까. 아, 돈 안줘요?


비웃음을 당하는 세 번째 인물 민재. 이번에는 민재 그녀의 순정이 웃음거리가 된다. 민재는 효섭 뿐만 아니라, 그녀의 애인 보경에게도 하찮은 존재이고, 민재를 향해 음욕을 품는 민수라는 남자에게도 도구로써 전락한다.

S#112. 효섭집 근처 거리

...중략...

 (떠나버리는 택시. 달리기를 멈추는 효섭, 표정 일그러진다. 숨을 헐떡

이며 효섭에게로 오는 민재.)


    민 재   저 여자누구예요?

    효 섭   ...(숨을 몰아쉬며 노려본다)...

    민 재   (더욱 효섭의 팔에 매달리며) 아니죠, 그죠? 아니죠?

    효 섭   (매섭게 민재를 떨치며) 너 왜 전화도 않구 막 오니?

    민 재   저 여자누구냐니까요!


 (거리를 걷는 사람들, 그들을 흥미롭게 구경하는 모습)


    효 섭   (소리 낮추며) 사랑하는 여자다. 이젠 됐냐?


 (꼿꼿하게 얼어붙는...)


    민 재   저한테 왜 이러시는거예요? 제가 뭘 잘못했어요, 선생님?

    효 섭   (정 떨어지는 표정) 잘못한거 없어.


 (잰 걸음으로 집을 향해 걷는 효섭)


    민 재   그럼 난 뭐였어요? 난 선생님한테 뭐였어요?


 (효섭, 사람들의 시선으로 창피해서 어쩔줄 모른다)


    효 섭   집에가서 얘기하자.


 (민재, 사람들의 시선일랑 아랑곳없이 효섭의 뒷 꽁무니를 쫄쫄 따라오

며 집요하게 묻는다)


    민 재   선생님은 아닌데 저만 선생님을 좋아한 거예요? 그래요, 선

            생님?

    효 섭   (초조해 진다) 입 닥치라고 했다.

    민 재   전 선생님이 하라는 일은 뭐든지 다 했고 하지 말라는건 안

            했어요.  선생님한테 어울리는 여자가 될려구요.  선생님도

            그건 아실거예요!

    효 섭   ...(참을려고 기를 쓴다)...

    민 재   선생님을 위해 제 인생을 바칠 각오도 돼 있어요.  근데 이

            제와서 어떻게 이러실수 있어요? 네? 도대체 제가 선생님한

            테 못해드린게 뭐 있어요?


 (하는 순간, 눈에 불이 번쩍하며 민재를 사정없이 후려치는 효섭. 피할

새도 없이 신음지르며 쓰러지는 민재)


    효 섭   난 이런 인간이야. 이제 알았냐?  접때도 저 여자랑같이 있

            는거 봐 놓고 그래도 모르겠냐? 멍청하게.

    민 재   (고개를 숙인채) 친구 부인이라고 그랬잖아요.

    효 섭   친구 부인이랑 술집엔 왜가냐? 그렇게도 눈치가 없냐?

    민 재   선,생,님이 저한테 거짓말 하신거에요?

    효 섭   (씩씩거리며) 난 니, 그 선생님!  선생니임!하는 소리도 지

            겹고 니꼴도 보기 싫으니까! 가!  더이상 따라오면 정말 개

            패듯이 패 버릴거니까, 알아서 해.


 (효섭, 집쪽으로 간다. 민재, 입술이 찢어져 피가 흐른다. 길 건너편에

서 효섭이 간 방향을 쳐다보고 있는 민재가 보이고  팬하면 양민수가 그

런 민재를 무표정한 얼굴로 쳐다보고 서있다.) 


네명의 주인공 중에서 유일하게 비웃음 당하지 않은 것은 효섭의 애인 보경 정도다. 교양 있는 30대 유부녀가 되어 사랑하는 사람과 가끔 만나고, 가정도 그럭저럭 꾸리는 그녀. 시나리오상에는 그녀의 남편 동우가 자살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영화에서는 담배사러 나가는 것으로 결말이 지어져 그냥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다시 영화를 보는데 정말로 울화가 치밀었다. 한 사람의 인생이 조롱거리가 되는게 슬프고, 소위 식자층이 말하는 ‘허위의식’ 같은 걸 말하기 위해서 또한 그걸 까발리기 위해서 비틀려져버린 극중 인물들이 안타까웠다. 

이 영화는 지극히 현실적이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캐릭터들의 이율배반적인 소망이 하나씩 들어있다. 비굴한 남자 효섭은 끝내 용감하게(?) 난동을 부리고, 결백증의 동우는 어울리지 않게 더러운(?) 창녀와 정을 통하고, 순수하게 사랑하고 싶었던 민재는 그걸 깨뜨리고, 숨막히는 일상의 주인공 보경은 액자를 발로 차서 찢기도 하고 가출을 감행하기도 한다. 

마지막에 피가 난무하는 씬은 가장 영화적인 소망의 실천이다. 아마도 민재의 기다림과 효섭의 비극이 스쳐지나가지 않았다면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뻔했다. 그래도 이들을 비웃지 말았으면 좋겠다. 

불행을 팔아먹는 소설가처럼 삼류가 되버린 우리의 현실을 또 팔아 비웃음을 사야 한다는 것이 못내 견디기 어렵다.  

영화랑 관계없이 중간에 어느 한 배우가 나온다. 아래 #19씬에서 조연으로 나온 배우는 지금은 굉장한 배우가 되었다. 이 엄청난 영화의 시나리오를 쓴 작가들은 이 영화의 주연들이 스타로 거듭나지 못한 것과 비슷한 처지가 되어버렸다. 우리는 우리 자신조차도 팔아 소비가 되어버리는가... 하옇튼 인생이라는게 돼지가 우물에 빠진는 것보다 더 꿀꿀한 일임은 틀림없다.


 S#19. 관훈 갤러리 앞 계단

 (계단에 앉은 효섭과 동석)

유리문 안으로 보이는 보경, 가방을 들고 서성이며 밖의 효섭을 본다.

그러다 고개를 돌려 그림을 본다)


    동 석   너희 두사람도 정말 대단하다 얼마나 됐지?

    효 섭   그러는 너는 언제 국수먹게 할거냐?

    동 석   기다려라. 얼마 안있음 먹기 싫어도 먹게 돼있다.

    효 섭   돈많이 버는 여자라 좋겠다.

    동 석   미-친- 놈.  


** 이글은 제가 온라인 영화비평 네오이마주 [시나리오 읽어주는 여자] 칼럼에 2005년12월에 게재한 바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