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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드라마/시나리오 읽어주는 여자

[시나리오 읽어주는 여자] '첫사랑(93)', 한 편의 시를 띄워본다


이명세 감독의 ‘첫사랑’은 이명세 감독과 양선희씨가 시나리오를 썼다.

스토리로 본다면 대중적이고 컨벤션에 충실한 이명세 감독의 영화들. 하지만 화면은 항상 남다르다. 그래서 그 화면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어느 순간에는 반하게 된다.


‘첫사랑’은 사전정보 없이 보게 되면 언제 만든 것이고 어느 시대가 배경인지 짐작하기가 어렵다. 헤어스타일과 의상은 70년대, 김혜수의 오바된 목소리는 더 이전을 떠올리게 하고, 연극적인 세트들은 해방 전후 같아보여서 도무지 시대를 짐작할 수가 없다.


시나리오에는 70년대라고 표기가 되어있으나, 이 시대 불명의 영화에서 묘하게도 어떤 판타지를 느끼게 한다. 군데군데 나타나는 파스퇴르우유의 광고 같은 그 궁서체의 자막들이며 뜬금없는 별빛이며 신파조의 대사들까지도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감수성을 해치지는 못한다.


씬 1 한적한 시골역 (낮)

(따사롭게 내리는 오전의 햇살을 받으며 누워있는 철로를 배경으로 평화롭게 서있는 역사가 한 장의 흑백 사진으로 인화되듯 떠오른다.
낙엽이 옅은 갈색으로 제 색깔을 띠기 시작하면,정지 되었던 흑백화면은 햇살에 물든 듯 노랗게 바뀐다.
화면 한쪽에서 바람이 불어와 낙엽을 날린다.
카메라 서서히 성에가 녹아내리는 대합실 창문으로 다가간다.대합실 안 연탄나로 주위에는 기차 시간을 기다리는 사,오십대의 남녀가 한가롭게 난로불을 쬐고 있다. 대합실 한 쪽 낡은 긴 의자에는 영신과 벙어리 장갑을 끼고 교복 위에 덧입은 감색 코트차림의 갈래머리 여고생,국민 학교 2,3학년 쯤으로 보이는 그녀의 남동생이 앉아있다.
남동생은 곶감이나 밤을 싼듯한 보퉁이를 끌어안고 바닥에 닿지 않은 발을 앞위로 흔들면서 풍선껌으로 풍선을 만들고 있다.풍선을 크게 만들 려다 튀어나가 바닥에 떨어진 껌을 줒어 입에 넣고 천연덕스럽게 다시 풍선을 만든다.)

...(중략)...


온통 파란색으로 색칠된 시골역에서 예쁜 사랑 이야기가 시작된다. 다른 사람보다 조금은 성장이 느려 보이는 갓 대학생이 된 영신은 고정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사이를 휘젓고 다니며 어린아이의 목소리로 60년대 여배우처럼 대사를 읊조리지만 생기발랄하게 움직여 영화의 균형을 깨뜨리기도 하고 맞춰주기도 하며 극 흐름을 이끈다. 



좀 더 현실감있는 영신이 좋아하는 연극을 지도하러 모셔온 선생인 창욱은 담배를 멋지게 피는 그냥 보통의 남자다. 영신이 창욱을 마땅치 않게 여기면서도 처음 봤을 때 그의 느낌은 아래 씬7에서 잘 나타난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담배를 태우고 현실의 것이 아닌 것같은 화면은 바로 다름아닌 영신의 심리를 나타낸다.


씬 7 선술집 안 (낮)

(겨울햇살이 조각조각 떨어져 있는 선술집 안.
가운데 불을 피울 수 있는 양철로 된 화덕 주위에 둘러 앉아 낮술을 마시 고 있는 영신, 창욱, 미숙.
한구석에는 날품팔이꾼인 듯한 사내가 국밥을 먹는 모습도 보인다.
-화덕 주변에는 구겨서 버린 담배갑고 담배꽁초가 어지럽게 널려있다.
-화덕 가운데는 먹다 남은 꽁치가 타는 냄새를 피워 올리고 있다.
-화덕 위에 놓인 양은 재떨이에도 담배 꽁초가 가득하다.
-입 주위와 옷에 줄줄 흘리면서 벌컥벌컥 막걸리를 들이키는 창욱.
 거칠게 술사발을 내려놓고 옷소매로 입 주위를 쓱 닦는다.
-찌그러진 양은 주전자를 들어 창욱에게 술을 따르려던 미숙,
 빈 주전자를 들어 흔들면서 주인에게 술을 주문한다.
-젓가락으로 꽁치를 뒤집고 있는 영신, 재미없고 지루한 듯 하다.
-술잔을 들어 건배를 하는 창욱과 미숙.
  취중에도 뭔가를 열정적으로 얘기하는 창욱.
-창욱의 얘기에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치는 미숙.
-미숙에게 담배를 권하는 창욱.
-목도리를 풀어서 미숙의 목게 감아주는 창욱.
-두손으로 머리칼을 헤집으려 머리를 긁어대는 창욱.
*그립고 향수가 느껴지고, 낭만이 가득한 시절의 모습일 것.
(이런 풍경들 위로 영신의 소리가 들려온다)

영 신 (마음의 소리) 영신아! 너 오늘 실망했지. 네가 상상한 사람은 낮술에 취해서 술냄새를 풀풀 풍기고, 상스러운 말을 함부로 하고, 줄담배만 피는 그런 사람은 아니 었으니까. 그지?네가 술 담배 못한다고 무시하지도 않고, 꿈이 뭔지 자상하게 물어보면서 관심도 가져주고.. 뭐 그런 사람이길 속으로는 은근히 바래기도 했었잖니?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뭐든지 다 노래가 되고, 시가되고, 보통사람에게는 없는 분위기. 뭐랄까? 아주 신성하고도 신비로운, 뭐 그런 분위기를 가졌길 바랬고... 그렇지만 너도 알잖니? 기대는 항상 실망을 동반한다는거. 사실, 예술가를 너무 신비한 존재로만 생각한 너도 좀 어리석었고, 그렇지 않니?

(영신과 창욱, 미숙 세 사람만 있던 선술집에는 어느새 형광등이 꺼지고, 투명인간으로 아까부터 그 자리에 있다가 이제 막 마술에서 풀린 것 처럼, 사람들로 가득해 지는 선술집)


우리가 70년대의 지나간 한국영화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닭살스런 대사도 웃으며 넘길만한 여유를 가지고 있다면 과잉된 감상주의도 낭만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첫사랑’을 보며 즐길 수 있으리라.




씬 11 영신의 집 안 (아침)

(쌀통 위에 놓인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오전 10시 무렵의 주부 프로그램 진행자의 목소리가 낮게 깔리는 부엌겸 좁은 거실. 들창을 통해 들어온 겨울 햇살이 가득 흘러 넘치고 있다.중앙에 있는 연탄 난로 위 양은 대야에서는 빨래가 삶기는지 김을 모락 모락 피워 올리고 있고,
영선,이제 일어났는지 상의와 바지가 따로 떨어진 누비잠옷 차림으로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있다. 이때 밖으로 연결된 부엌문에서 들려오는 영신의 엄마, 깔끔해 보이는 40대.
밖에서 다듬은 겨울 푸성귀와 도마를 담은 소쿠리를 들고 있다. 김치뿐인 식탁을 보고 부엌으로 가서 반찬 두어가지를 꺼내온다.)

엄 마 (반찬을 식탁에 놓으며 느닷없이) 너도 담배 피냐? 연극 한답시고 담배나 피고,남학생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술이나 마시고, 깡패들처럼 그럴거면 연극같은 거 하지도 마라. 니네 아버지 봐라. 너희 둘 공부 시키려고 얼마나 고생하시니? 담배값 아끼려고 담배까지 다 끊으시고...
(난로가로 가서 연탄불을 확인하고, 불문을 조절한 다음, 난로 뚜껑을 닫 고, 다시 대야를 올려 놓고, 막대기로 짤래를 뒤집고 부엌 뒷문으로 휙 나 가는 엄마)

영 신 (마음의 소리) (관객들에게 하소연이라도 하듯 카메라를 보며) 엄마는 늘 저런식입니다. 마치 미국 영화의 형가들처럼 늘 일방적으로 몰아 부치죠. 사실 남학생들 속에 있다 보면, 옷에 담배냄새 배는건 당연 하잖아요.술이야 딱 한잔 마셔본 적이 있지만 맹세코 담배만은 피운적이 없다구요! (생각해 보니까 분하다는 듯이 발딱 일어서며 큰 소리로) 엄마!!
  
(땡땡... 시계소리에 화들짝 놀라 황급히 화면 밖으로 사라진다. 뒤이어 경쾌한 피아노 음악이 흐른다)


영신은 창욱의 집 근처를 기웃거리다가 창욱을 만나게 된다. 좋아하던 마음이 다시 확인되며 영신은 날아갈 것처럼 마음이 붕떠서 급기야는 투명인간처럼 된다.


씬 27 신작로 (밤)

(논위로 쏟아지는 달빛 때문에 대낮처럼 하얀 밤길. 양 옆으로 늘어선 가 로수들의 그림자 위에만 소복히 어둠이 내려 있는 듯한 길을 자전거를 타 고 신나게 달리는 영신. 손전등을 들고 심부름을 갔다 오던 오누이가 마치 도깨비를 본 듯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들 시야로는 자전거가 사람을 태우지 않고 저혼자 달려 길 끝으로 사라 진다.)


깜찍한 영신의 상상은 좋아하는 창욱의 방까지 엿본다.


씬 28-1 창욱의 방안 (밤)

(창욱, 뒤돌아보면 ,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살며시 닫히는 문.
다시 하던 일을 계속하는 창욱.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포트에서 빈 커피잔으로 물이 따루어진다.
티스푼을 들고 커피잔에 든 커피와 설탕, 프림, 그리고 자신의 사랑이 잘 녹아 섞이도록 정성껏, 그러나 소리는 나지 않게 젓는다.
커피잔이 공중을 날아가서 책상위에 놓여진다.
창욱은 커피잔이 원래 그 자리에 놓여 있었던 것처럼 무심코 잔을 들어 커 피를 마신다. 맛과 향기를 음미하며 기분 좋게 커피를 마시는 창욱을 흡족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영신.
창욱이 일하는 모습을 여러 장소에서 여러 각도로 바라보는 영신.
- 멀리 벽에 기대어서
- 책상에 걸터앉아서
- 창욱의 등 뒤에서 왼쪽, 오른쪽으로
- 창욱위 얼굴 앞 책상에 턱을 괴고
일에 열중해 있는 창욱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으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창욱의 몸쪽으로 손이 간다. 마치 자신도 모르는 힘에 이끌리듯 -
거대한 자력을 가진 자석에 저절로 이끌리듯이 창욱도 영신의 손을 잡는 다. 그때 창욱의 눈에는 보이지 않던 영신의 모습이 나타난다)
( 짧게 F.O )


첫사랑을 늦게 시작한 영신은 사춘기 소녀처럼 된다.


씬 33 밤 하늘

(까만 밤,
하늘에는 다이아몬드를 쏟아놓은 듯이 별이 반짝이고 있다.
저 멀리 별똥별 한가 어두운 허공을 가로지르며 떨어진다. 별
똥별이 떨어지는 속도와 같이 화면이 어두워진다
어두운 화면에 바구니에서 글자들이 한꺼번에 쏟아지듯이 녹색으로 쏟아져 내리는 자막.
"아름다움이 슬프다는 얘기가 있어 마음에 한줄기 시내가 흘러 달이 밝아서 온 길도 나중엔 흐리었다."
- 김광섭의 <달밤>에서 -
( 자막 F.O )


대부분의 첫사랑이 짝사랑인 것처럼 영신은 창욱을 홀로 좋아한다. 언제나 거리감 있는 영신의 짝사랑 상대인 창욱은 그런 그녀를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면서 지켜봐준다.


씬 51 밤거리

(어느새 눈은 그치고, 간혹 부는 바람에 날리는 눈.
세상이 온통 흰 옷을 입은 듯 하다.
문을 닫는 상점이 하나 둘 보인다.
미끄러질까 조심조심 걸으며 집으로 가는 사람들 모습도 보인다.
창욱,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차도 쪽으로 서서 걷고 있다.
창욱 뒤에 약간 지쳐서 뒤뚱거리며 걷는 영신.
카바이트 불을 밝히고 장작불을 피워서 고구마를 굽고 있는 고구마장수의 수레를 지나는 영신과 창욱)

창 욱 중학교 다닐 때 였어.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올때였지. 숟가락이 든 빈 도시락을 달랑거리면서. 어두운 긴 골목길을 걸었을 때 였는데, 꼭 누군가가 내 뒤를 따라 오는것만 같았지. 걸음을 멈추고 휙 돌아보면, 아무도 없었어. 어둠 뿐이었지. 그러면 막 두려워지곤 했어. 그래서 눈을 힘주어 꽉 감았다가 뜨고 앞을 보면, 거기도 어둠 뿐이었지. 어둠 ...... 살면서 늘 그랬어. 앞을 봐도 어둠이고, 뒤를 봐도 어둠......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잘 몰랐지.


씬 52 육교 위 (밤)

(육교 위를 걷는 영신과 창욱)

창 욱 ... 그때 한 여자를 만났지. 어둠 속에서 좌초한 나를 인도해 줄 등대불 같았던 여자, 그래서 결혼을 했지.
영 신 .......




첫사랑은 절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은 왜 생긴걸까. 너무 어려서 라고들 하지만 영신은 그렇게 늦게 시작한 첫사랑인데도 창욱을 떠나보낸다.


씬 85 연극 '우리 읍내'

(경쾌한 음악이 시작된다.
빈 화면 좌우에서 분장을 한 연극반원 전체가 우루루 몰려 들어와 사진 찍는 포즈로 정렬을 마치면, 찰칵 소리와 함께 화면이 정지된다.
화면이 풀리면, 연극의 한 장면, 한 장의 스틸 사진으로 찍혀진다.
이때 사람들이 화면에 등장하고 퇴장하는 모습이 경쾌한 뮤지컬과 슬랩 스틱한 분위기로 묘사된다.
그위로 깔리는 영신의 나레이션)

영 신 (마음의 소리) 왠일일까? 나를 속인 사람이 없는데도 왠일일까? 나는 왜 이렇게 슬픈 것일까? 곰곰히 생각해 보자. 영신아 무엄이 어고 무엇이 갔는가를. 무엇이 눈앞에서 신시루 처럼 피었다 스러졌는가를...
(연극반원 모두가 무대에 나와 손에 손을 잡고 끝 인사를 한다.
화면이 어두워지면서 장내가 떠나갈듯한 박수소리가 들린다.)


첫사랑이 영신의 마음을 흔들고 그냥 스쳐간 것처럼, 파란색 세트의 따뜻한 노란색 조명아래서 펼쳐진 영화가 마음 한구석에 조용히 남는다.


씬 90 한적한 시골역 (새벽)

(역사쪽을 향해 눈위에 찍혀 있는 한 사람의 발자국. 빠앙- 기적소리.  
침묵 속에서 눈송이가 바람에 날리듯 하다가 눈송이들은 어느새 흩날리는 꽃들로 바뀌고, 봄빛이 가득해진다. 이 풍경들이 한 장의 정지된 흑백 사진으로 바뀐다. ) 

( F.O ) 

(어둠속에서 돋아나는 새순처럼 연두빛으로 떠오르는 자막) 

“금인 시간의 비밀을 알고 난 뒤의
즐거움을 그대는 알고 있을까
처음과 깥은 항상 아무것도 없고
그 사이에 흐르는
노래의 자연
울음의 자연을
헛됨을 버리지 말고
흘러감을 버리지 말고
기억하렴“
- 정현종의 '기억제' 중에서 -


(자막, 사라지고.
귀에 익은 70년대 음악이 흐르고,
그동안 영신이 사랑을 만나고, 사랑에 빠지고, 사랑 때문에 즐거워 하고, 고통스러워 하고, 성장한 모습들이, 하나씩 떠올라 화면을 메운다.)



** 이글은 제가 온라인 영화비평 네오이마주 [시나리오 읽어주는 여자] 칼럼에 2006년1월에 게재한 바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