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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드라마/시나리오 읽어주는 여자

[시나리오 읽어주는 여자] '황산벌 (2003)', 역사의 유쾌한 상상


공부하면서 쓴 첫 번째 시나리오가 ‘솔병초입대명’이라는 말도 안되는 사극이었다.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하여 대사가 있는 등장인물이 스무명이 넘었었다. 전쟁도구나 방법이 있는 문헌을 찾기가 어려워서 나중에 몇 가지 병서와 박물관 유물을 참고했었다. 앞으로 주인공은 두 명으로 잘 아는 이야기를 쓰라는 주위의 충고로 그 뒤로 내리 로맨스만 써댔는데 역시나 필자는 ‘사극’이 좋다. 그 뒤로 로맨틱 드라마, 로맨틱 호러로 장르를 넓히고 있는데 다음은 로맨틱 사극을 써야겠다.


최석환씨가 쓴 ‘황산벌’은 아무래도 전쟁이야기를 풀어가다보니 소설처럼 여기저기로 이야기가 분산이 되어 끝에 힘을 잃은 감이 있는데, 다음 작품 ‘왕의 남자’에서는 제대로 인물에 집중하고 있다. 실제적인 사건을 배경으로 하거나 역사를 재해석하는 영화는 사건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인물에 집중해야 영화가 산다.

이 영화의 경우에는 계백(박중훈)과 김유신(정진영)에 좀 더 집중했어야 하는데 그 부분이 아쉽다. 그래도 이 영화는 감히 꿈꾸지 못할 유쾌한 상상으로 가득 차있다. 각 지방 사투리를 쓰는 상상도, 거시기한 갑옷에 관한 비밀도, 정치적 풍자도, 각 전쟁장면은 다시 봐도 즐겁다.



I. 전쟁


역사의 실제와 허구를 넘나드는 영화는 필자처럼 무식한 관객이 어디부터 어떻게 무엇을 사실로 받아들여야 할지 잠시 주춤하는 사이에 정치적인 풍자를 넘어서 어느새 전쟁으로 치닫고 있었다. 

영화에서는 탐색전, 신경전, 맞짱, 심리전으로 네가지 싸움이 차례로 시전이 된다. 시나리오랑 순서는 다르지만 무작정 검과 창을 들고 나가 진법을 펼친 게 아니어서 사뭇 흥미가 있었다. 전쟁 참 복잡하게 하네...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대해 김유신은 아래씬에서 ‘전쟁에는 절차가 있는 법’이라며 이 무지한 후손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다.


29.김유신 사령부-오후

모여앉아 대책을 강구하고 있는 김유신, 김법민, 흠순과 장수들. 


김품일

내일이데이 내일! 

지금 저런 짓하고 있을 짬이 없데이.


김흠순

하모! 계백이 아~들한테는 저런거 안통한다카이.


김법민

약속날짜 못지키면 누가 책임 질끼고? 

이거는 참수형감이데이, 참수형! 지금 총공격 해야된다 안카나! 


김유신 

(서늘한 눈빛으로 법민을 보며) 총공격?! 지금 하까? 


김유신, 갑자기 칼을 뽑아들고 군막을 뛰쳐나가, 

미친놈처럼 “전군 공격! 공격하라! 전군 총공격하라카이!”를 외치고는 다시 들어와 


김유신 

(비웃으며)니 봤제? 총공격 안하네! 

전쟁에는 절차가 있는 법이데이. 


김법민 

절차 따지다 황산벌에서 늙어 죽을끼요?!


김유신

느그들은 모린다. 전쟁이 뭔지. 

지금 총공격하믄 그건 몰살이데이.

계백이 지 처자식 죽이고 나온거 보래이. 

그래서 계백이 갸가 무서운거래이. 

갸는 그거 한방으로 병사들 독기를 확 올려 뿐 거 아니가.


김흠순

그람 우얄낀데?! 우리가 집에 가 처자식 다 쥑이고 올까? 

그라믄 전투할끼가?


김유신

가만 있어바라, 이번엔 내가 직접 나선다. 

천존, 계백이한테 장기 한판 두자케라.


전쟁은 코믹하게 진짜 우습지도 않게 전개되다가 드디어는 그 광기를 드러내게 된다. 


44.신라 방패진영 앞-낮 

관창의 베인 머리를 달고 돌아온 말. 

김품일, 아들 관창의 머리가 담긴 보자기를 부여잡고 비통해하고 있다.

그 뒤에 서있는 김유신과 김법민, 김흠순, 천존과 장수들.

관창의 죽음을 맞이하는 병사들의 공포에 젖은 표정.


신라병사2 

김유신이가 불리하면 꼭 써묵는 수법 아이가? 


신라병사3 

저 짓도 한두번이지 저런다고 사기가 올라가나? 


김유신, 아들들을 잃은 김흠순과 김품일의 슬픔을 애써 외면한 채 

흐린 하늘을 보고 있다가... 


김유신 

화랑들을 계속 보내라! 


김흠순 

행님, 니 미칬나?! 


김유신 

그래 미칬다! 

전쟁은 미친놈들 짓인기야!! 

지 가족 모두 처죽이고 나온 계백이가 제정신이가? 

글마가 미치면 내도 미친다. 

미친 놈한텐 미친 놈이 약인기라! 

니 죽기 싫으면 가만 잇그레이... 

분위기 잡혀가는데 산통깨지 말고. 

(모여있는 화랑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화랑들을 계속 보내!  

꽃은 화려할 때 지는기야! 


싸늘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는 김유신. 


54.백제군 구령대 앞-오후 

중장갑으로 무장한 기마병과 보병(100명 정도)들을 모아 점검하는 계백. 

계백이 눈짓을 하자 한쪽에서 누군가 백마 한 마리를 끌고 나오고, 

이어 장수1이 칼로 백마의 목을 벤다. 

쏟아져 흐르는 백마의 피를 손에 묻혀 한명씩 차례로 입술에 쓱- 칠한다. 

계백 이하 장수들, 병사들의 얼굴이, 전율이 흐를 정도로 시뻘건 피로 물들어 있다.

계백, 병사들의 의식이 끝나자 칼을 뽑아들고, 


계백

자랑스런 백제의 아그들아, 

머덜라고 백마의 피를 입술에 발른거시더냐?

고거슨 바로 죽음의 맹세가 아니더냐?!

사는 것은 불확실한거시다. 

이 징헌 놈의 인간시상에 확실한 것은 딱 하나 뿐이여. 

그것은, 사나이가 미련과 변명을 버리고, 

아쌀하게 거시기하는거다! 

우리 오늘, 여그 황산벌에서, 아쌀하게 거시기해불자!!! 


장수1/병사들

(장수1의 거시기 선창에 따라 병사들 해불자고 복창한다)

거시기 해불자! 거시기 해불자! 

거시기! 해불자! 거시기! 해불자!....


입술과 얼굴에 붉은 바디페인팅을 한 붉은 악마들의 응원 같은 분위기다.



II. 정치


전쟁은 정치 때문에 이루어지기도 하고, 전쟁을 위해서 정치가 필요하기도 하다. 

전자에 대해서는 당의 힘을 빌어서 백제를 칠 수 밖에 없었던 신라의 정치적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후자는 일반적으로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기 위해 장수들이 펼치는 전략(선)과 전쟁의 전후처리문제 협상(후)을 말한다.

이 영화는 한국사람, 그것도 중등교육이상의 상식이 있는 사람이 보아야 재미있다. 왜냐하면 전쟁이 필요한 정치적 배경의 설명 없이 바로 영화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아래 첫씬에서 각 나라 대표 뒤에 써 있는 글자를 극장에서는 몰라보았으나 집에서 다시 보니 나라의 이름이 아닌가. 의자왕 뒤에는 백제의 ‘濟’, 무열왕 김춘추 뒤에는 신라의 ‘羅’, 연개소문 뒤에는 고려의 ‘麗’, 당황제 뒤에는 ‘唐’ 깃발이 있으니 말이다. 

아무렴 어떠랴 상당히 희화화된 삼국시대 각 나라 대표들과 당황제의 대화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이래로 사대주의적 사관에 찌든 우리에게 약간의 쾌감을 준다. 당황제를 향한 연개소문과 의자왕의 발칙한 대사도 우습지만 특히 당황제와 미국 부시의 ‘악의 축(axis of evil)' 발언이 묘하게 겹쳐지며 속이 조끔은 시원해진다.


1.군막 회담장-낮

당이란 로고에서 카메라 트랙 백하면 당황제와 의자왕, 김춘추, 연개소문이 회담을 벌이고 있다.   


당황제 (중국말-자막)

현재 동북아의 긴장은 대당제국이 정한 국제질서를 

고구려와 백제가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들 모두가 이 황제의 백성일진데, 짐이 부덕한 소치로다.


연개소문 

우리가 와 니 백성이야?!

니들 당나라 몇 년 돼서?! 50년도 아니되지 않았슴메?! 

우리 고구려는 700년 돼서, 700년, 알간! 


당황제(중국말-자막) 

연개소문, 그대가 천하의 질서를 어기려 하는가?!


     연개소문 

질서 누가 정하는 건데??!  


당황제(중국말-자막) 

그 질서는 하늘이 정했고, 짐은 하늘의 아들 천자다! 


연개소문 

니 아바이 당태종이가 형제들 쳐죽이고 황제된 것도 하늘이 정한 질서냐?! 


김춘추 

니 진짜 무식하데이, 황제께선 정권의 철학적 정통성을 말씀하고 안있나? 


연개소문 

정통성? 그래, 나는 쿠데타 일으켜 정권 잡았다 와?! 

김춘추, 니, 반쪽짜리 왕족 주제에, 김유신이랑 짝짜꿍해서 정권 잡지 안아서?! 

의자왕, 니 애비도 서자 아니어서?! 여기 정통성 있는 놈이 어딨서? 

떼놈들이 인정해주면 그게 정통성인가?

전쟁은 정통성 없는 놈들이 정통성 세울려고 하는기야. 


의자왕 

맞제, 고것이 정치적 경륜이제! 


김춘추 

정치적 경륜?! 하루가 멀다하고 쳐들어와 남의 백성 쳐죽이는게 경륜이가?! 

니 놈 왕되고 지난 20년간 우리 신라는 하루도 편할 날 없었데이!! 


의자왕 

아 즉위 초기에 정권장악허고, 국론통일 할라믄 다들 하는거 아녀? 

우리 선수들끼리 지난 야그는 허지 말자. 

  ...(중략)...


 당황제(중국말-자막) 

그만! 짐이 이번에 개입한 이유는... 

(참다못해) 너희들이 막나가니까, 나도 노골적으로 말하겠다. 

강대국이 까라면 까! 


의자왕 

뭘 까라는 건지 구체적으로 말해보랑께. 

  

당황제(중국말-자막) 

첫째! 조공문제...

조공은 황제가 정한 국제질서에 순응하겠다는 약소국들의 의사표시다. 

헌데 너희 백제놈들, 왜 고구려와 짜고 신라의 조공길을 막나?! 


의자왕 

아따 김춘추 저거시 싸가지 없게 노니께...


당황제(중국말-자막) 

둘째! 우리 당나라 기술자들을 돈으로 빼돌려서, 

초강력 쇠뇌등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는 속셈이 뭐냐?! 


의자왕 

그건... 순수민간차원의 과학기술교류라고 보고 받았는디... 


당황제 (중국말-자막) 

셋째! 고구려는 우리 당나라가 극구 만류한 천리장성을 축조해

주변국의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연개소문 

이 종간나 새끼?! 내가 성을 쌓던 부수던 니가 무슨 상관이야! 

함 해보자 이기야? 


김춘추

이놈이?! 감히 황제에게...


연개소문 

뭐이 어드레?! 김춘추, 너, 옛날에 내가 뭐라했서. 

고구려,백제,신라가 힘을 합쳐 저 당나라 새끼들 박살내자 아니했슴메?!  

 

당황제(중국말-자막) 

개소리!! 짐은 오늘 이 자리에서, 고구려와 백제를, 

천하의 안정과 질서를 위협하는, '악의 축'으로 선포하는 바이다!! 

   

김춘추 

하모, 저것들은 악으 축 정도가 아니라, 악으 덩어리라카이! 


연개소문

무스거?!(벌떡 일어나며)

  ...(중략)...

                  

김춘추 

(의자왕을 손가락으로 지목하며) 

니는 내 손에 죽는데이!


    의자왕

음마? 시방 선전포고하는거여 뭐여?



전쟁이 정통성 없는 놈들이 정통성 세울려고 하는 짓거리인지 백성만 쳐죽이는 일인지 모르겠지만, 정치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것만은 확실히 제대로 표현했다.

아래씬에서의 김춘추의 발언들은 그런면에서 정말로 깜찍하다.


6.금돌성 김춘추 캠프(안)-밤

...(중략)...

김춘추 

언제, 내는 당나라 황제하고 얘기 다 끝났다 아이가?

소정방이는 처남이 맡아주소.

그카고 절대로 소정방이 비위를 거슬리면 안된데이. 


김유신 

와?  


김춘추

황제가 전쟁 끝나면 대동강 이남은 내게 준다켔다.

소정방이가 딴소리 몬하게 그걸 분명히 해라!


김유신

그기 단교?


김춘추

이번 전쟁으로 우리가 뭘 얼매나 얻느냐는 전적으로

대장군이 하기에 달린기라.


김유신

잘몬하면 내 탓이고 잘하면 다 매제꺼네?


김춘추

근데, 대장군 니, 말투 좀 가려하면 안되나?

우리 신라는 다 좋은데, 우아래 없는 말투는 싹 뜯어고쳐야 한데이.


김유신

그기 우리 신라 전통 아니가? 

얼매나 살갑고 좋노... 전하. 


김춘추

됐다 고마, 출발하그라.


김유신 휙 돌아나간다

김춘추, 김유신 나간쪽을 보고


김춘추 

절마 저거...

(법민에게) 이 전쟁은 이미 끝났데이. 

전투는 요식행위고, 인자 전후처리 문제만 남은기라. 


숨어있던 신라협상대표가 나선다. 


    김춘추

(더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하곤)

전후처리 협상대표로 너를 따로 보내는 이유를, 니 알제?


신라협상대표 

예, 전하...


김춘추 

내는 이제 김유신이 같은 꼰대들은 안믿는데이. 

니같은 젊은 피를 믿는데이. 

이번 협상에서! 

(의자에서 일어나) 

의자왕의 신병처리만은, 반드시 내 손으로 해야 한다!!! 

(자기 분에 못 이겨 의자를 발로 차며) 

의자왕 그 새끼를 쳐죽여가 내 딸내미 원수를 갚아야 한다카이!!  

니는 그것 해내면 출세하는기고, 

그것 몬하면 내 손에 죽는데이. 알것나?! 알것제!! 


협상대표 

(사색이 되어) 

예, 전하.


협상대표를  물러가라고 손짓해서 내보내고  


김법민

내는 완전히 깍두기네... 

                     

김춘추

니는 태자 아이가. 내 담엔 니가 왕이야. 

김유신이 글마가 기회포착하는덴 귀신이데이.

니는 그걸 배워야 한데이.

            

김법민

내는 외삼춘이 무섭다.


김춘추

이번 전쟁에서, 글마가 왜 무서븐지를 배우란 말이다.

니 적은 백제가 아니라 김유신이데이.

...(중략)...


전투는 요식행위라며 전쟁을 시작하기도 전에 전후처리 협상부터 시작하는데서 김춘추의 정치 9단 솜씨를 엿볼 수 있지만, 군자가 취할 행동은 아니다. 손자병법에도 ‘전쟁을 하는 방법으로 적국을 손상시키지 않고 항복시키는 것이 최선책이며, 격파해서 항복시키는 것은 차선책이다’란 말이 있지 않는가. 애초에 이 전쟁은 목적도 수단도 과정도 후세의 비판을 면키 어렵다. 결과론적으로 보아도, 신라가 삼국통일로 민족 문화 발전의 토대를 이루었다고 보기에는 고구려의 후예 ‘발해’의 존재가 너무 크지 않은가 말이다.

불손한 후손의 정치적 풍자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쌀배달’이라고 명명된 보급품 지원이다.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칠 때, 13만 대군의 보급품을 대기로 했던 신라의 행동을 두말하지 않고 쌀배달이라고 칭하고 있다. 중국에 대한 쌀배달은 이 때뿐이 아니었다. 임진왜란 때도 명나라는 조선에게 쌀배달을 시키지 않았던가. ‘징비록’이란 책에서 밝히고 있듯이 대제학 류성룡은 심지어 명나라 사신 앞에 무뤂을 꿇고 눈물까지 흘렸다. 

중국집에서 짜장면 시키듯이 쌀을 달라면 쌀이 오냔 말이다.


53.김유신 사령부-오후 

장군들 김유신을 필두로 비장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김법민 

공격은 언제 시작하능교?


김유신 

(생각을 정리하며 뜸을 들여서)

...법민아, 니는 내 조카제?


    

김법민

(머쓱해하며)예.


김유신

흠순아. 닌 내 동생이제?


 김흠순

하모.


김유신

김품일이 닌 법민이 사돈이제.


김품일

예,대장군.


김유신

그러니까 우리는 다 친척이제?

남이 아닌기라.


    법민, 흠순, 품일

(서로 눈치를 보며 의아해하며)

....


    김유신

이중에서 법민이는 왕이 될끼고, 우리는 대신라국의 자랑스런 장군이 되가

법민이를 도울기다. (사이) 우린 당나라를 위해 사우는기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 사우는 기다. 알긋제?

우린 우리 자신을 위해 살배달 가는기다. 분명하제? 

우린 남이 아니제? 우리가 남이가?!


    법민,흠순,품일

아닙니더!


김유신

인자부터 싹쓸어 버리는기라. 각오됐나?!


법민,흠순,품일

(우렁차게)예!!


뻐꾸기1,2 뛰어 들어오며,


뻐꾸기1 

대장군이 하라는대로 켔드마는... 


뻐꾸기2 

분위기 금방 잡히데예. 


김유신 

욕봤데이. 

(장수들에게) 

됐다. 가자. 인자 우린 이긴다!!

전쟁에는 역시 정치가 중요하다. 세치 혀가 수많은 사람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III. 개인의 역사


영화는 대체로 백제의 계백장군에게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지만, 끝까지 영화를 보게 되면 주인공이 김유신임을 알 수가 있다. 아무래도 영화적인 상상도 역사를 바꿀 수는 없었기에 그리되지 않았나 싶다. 

영화는 사극에다가 전쟁까지 있어 수많은 배역들이 나온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몇몇의 개인을 지목해 보자. 이들은 모두 자신이 원했던, 원치 않던 간에 이름을 남기고 죽었다.

첫 번째, 계백의 처자이다. 순순히 죽었으리라는 상상이 약간 빗겨나가며 그동안 영웅적인 행동으로 떠받들렸던 계백의 행동이 목적을 잃는다.


58.계백의 집-밤(14씬 연결, 회상)


계백 

그거 마시고 죽을겨, 내 칼에 죽을겨? 

(벙찐 가족들의 마른하늘의 날벼락이란 표정) 

이 전쟁이 끝나면 어차피 너희들은... 

살아서 치욕을 당하느니 명예롭게 죽어라. 


계백처 

뭐시라고라, 시방 이녁이 그런 말 헐 자격이 있당가요?! 

그러면 우덜이 아이고 서방님, 아이고 아부지, 

이 사약 먹고 디질다 그랄줄 아셨소? 

에끼, 이 냥반! 


계백 

(칼을 치켜들며) 

이 에편네가! 


계백처 

시방, 내 생떼거튼 새끼들헌테 자진해서 디지라고라. 

씨만 뿌려놓고 전쟁터만 싸돌아댕긴 인간이 

이제 와서 뭐시라고라! 


방밖 마당에 구부정히 석상처럼 서있는 팔매. 


계백 

이 예펜네가 환장을...


계백처 

그려 환장했다 왜?

내가 결혼해서 이날 이때까지 악밖에 안남은 년이여! 

옘뱅하고... 이 인간이 니가 해준 게 뭐있다고... 


계백 

이 여편네가 미쳤나?! 


계백처 

전쟁을 하든 말든 나라가 망하든 말든, 

그거시 뭐인데 니가 내 새끼들을 죽여! 

(계백 칼을 치켜들고 죽이려 하자, 계백 아들딸들 계백처 뒤로 숨는다) 


계백처 

니 애비 에미가 살아 있으면, 니 애비 에미도 이렇게 죽일껴? 


그 말에 계백 주춤하고, 


계백

호랭이는 죽어서 꺼죽을 냄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냄긴다고 혔다. 


계백처 

뭐시 어쩌고 어쪄?!

아가리는 비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라고 혔어.   

호랭이는 가죽 땜세 디지고 

사람은 이름 땜세 디지는거여, 이 인간아! 


악다구니를 쓰는 마누라와 아이들을 향해 칼을 치켜드는 계백. 

석상처럼 서 있는 문밖의 팔매, 문밖에서 보는 그림자들, 

방문을 가로막고 서있는 계백, 

마침내 칼을 내리치는 계백의 모습이 방문 밖 창호지에 비친다. 


두 번째, 젊은 화랑들이다. 영화 스토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실제 있었던 일들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보니 전쟁이라는 게 참 치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36.김유신 사령부 뒤편-아침 

김품일이 10대 아들, 화랑 관창을 불러놓고 얘기 중이다. 

김품일은 관창을 등지고 서 있다.


김품일 

우리는 진골정통의 뼈따구 있는 가문이데이. 

김유신, 김흠순이 같은 가야파 놈들한테 밀려서 되겟나. 

오늘부로 사군이충, 사친이효, 붕우유신, 임전무퇴, 살생유택, 

세속오계 이거 다 개소리다! 

오늘부로 화랑하면 관창! 관창하면 화랑이다! 

이 한마디면 되는기다. 니는 역사에 영원히 기억될끼야. 


관창 

(의심의 눈초리로) 

아부지, 지금 누가 시켜서 이러는거 아니지예? 


김품일 

하모! 세상에 누가 시킨다고 지 자식을 

죽음으로 내몰 애비가 어딨겠노? 


관창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로) 

아부지, 이거 정말 개죽음 아니지예? 


김품일

무신 소리! (코치가 역도선수 뺨을 때리듯 두 손으로 양쪽 뺨을 때리며) 

넌 뜬다! 뜬다! 반드시 뜬다! 내가 보장하마! 

화랑 관창 역사에 길이 남으리! 

관창아, 꿈은 이루어진데이.

그랄려면 니 기냥 죽으면 안된데이. 

정신 바짝차리고 죽어야 한데이! 

폼나게! 비장하게! 장열하게! 

(모션을 취하는 품일) 

이기 중요한기라! 

넌 뜨게 되있어! 틀림없데이. 

안뜨면 내가 니 아들이데이. 

(하는 사이, 반굴이 말에 올라 신라 진영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에잉?! 김흠순이, 문디자슥이 선수치네!


세 번째, 백제의 마지막 병사 거시기. 이름을 남기기를 원했던 계백과 신라의 화랑들과 다르게 끝에 살아남은 한 사람은 이름도 없는 ‘거시기’ 일 뿐이었다. 역사에 이름이 실리지 않은 수많은 개인의 역사가 있었음을 우리는 알게 된다.



56.백제군 진영 식량창고-오후

입구를 임시로 막은 창고에 갇힌 계백과 팔매. 백제장수1,3과 백제병사1(거시기).

모두 죽고 다섯 명  남았다. 우리에 갇힌 맹수들 같다. 

창고 뒤쪽에서 도끼로 개구멍을 파는 장수1. 


계백 

거 날씨 한번 겁나게 덥네 이. 


백제병사1(거시기)

어따, 날이 더워야 나락이 여물지라잉. 


장수1

(도끼로 판 개구멍 앞에서)

장군! 어서 피하시죠.


백제병사1(거시기) 

(공포에 질려 떨면서)

아따 염병허시요잉. 여그서 죽자했으면 죽는거제. 

추접스럽게 시방 머한다요. 깨깟허게 갑시다이. 

옛말에, 호랭이는 죽어서 거죽을 냄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냄긴다고 안헙디까? 


계백 

니 이름이 뭐시여? 


백제병사1(거시기)

나 겉은 놈이 이름 냄겨서 뭐더것소 이. 

그냥 거시기라고 알아두쇼! 


이때, 밖에서 ‘계백, 계백 나와라 나오라카이!!’ 함성소리.


계백 

.... 


장수3

장군님, 싸게 피신을... 


계백 

거시기, 자넨 뭣허다 왔는가? 


백제병사1(거시기) 

농사짓다 왔지라,지금쯤 나락이 거진 다 여물었것는디... 

울엄니 혼자서 존나게 고상허게 생겼네 이.


계백 

죽을 때 죽더라도 뭔가 하난 냄겨야 되지 않겠능가이? 

난 거시기 자네를 남기고 싶구만... 

가게, 가서 나락이나 잘 비게


백제병사1(거시기)

워메 장군, 징하시오 이. (하고 목책틈으로 빠져 나가는 거시기) 


계백 

...가자, 외통수에 걸렸으면 싸게 장기판을 걷어야제. 

(칼을 들며) 전~군! 

(일제히 칼과 창을 들면) 공~격! 


영화적 상상이 역사를 바꾸지는 못했다. 재미로 역사를 왜곡해서도 안되는 것이고 우리 또한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자기긍정’으로 오랜 ‘자기부정’의 역사인식에서 탈피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 이글은 제가 온라인 영화비평 네오이마주 [시나리오 읽어주는 여자] 칼럼에 2006년1월에 게재한 바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