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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드라마/시나리오 읽어주는 여자

[시나리오 읽어주는 여자] 도마뱀 - 그 말을 믿었니 바보


도마뱀은 ‘아리조강납치사건’이란 이름으로 발표된 황인호씨의 시나리오다. 시나리오마켓(구 시나리오DB)이 생기고 초기에 팔린 작품으로 신인작가들의 기대가 컸던 작품이다. 이후 마켓을 통해 팔린 ‘구타유발자들’과 함께 신인작가들에게 전설이 된 시나리오다.

술만 마시면 더 어리버리해지는 동료작가 한 명은 계속 ‘애리조나납치사건’이라 부르기도 하였는데, DB에서 매매될 당시 버전에서는 후반부에 아리와 조강이 같이 CIA요원에게 납치가 되는 전개가 있어서 제목이 그랬었다. 여전히 회의적인 의견이 많지만, 신인작가들이 꾸준히 시나리오 마켓에 자기 시나리오를 공개하고 있으니 관심이 있는 분들께서는 직접 시장을 구경하시기 바란다.

‘아리조강납치사건’ 을 읽고서 울었다는 사람들이 꽤 있어서 ‘도마뱀’을 보기전에 한 번 들춰보았다. 개봉된 것과 큰 차이는 없었지만 좀 더 황당무계했던 작품을 읽는데 75씬을 막 넘어가는데 눈물이 난다. 사실 ‘도마뱀’은 궁금하기도 했지만 예고편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극장에 갔다. 소극장이라 그런지 관객 반응이 더 확실하게 와 닿았았다. 중반까지 환호하던 관객은 마지막에 싸늘했다. 왜 관객이 화가 났는지 알지만 한 가지 변명을 해두고 싶은 것이 있어서 오늘 이 시나리오를 읽는다.

1. 아리와


저주 받은 아이라고 주장하는 아리와 그녀의 말은 뭐든지 믿는 순수한 시골 아이 조강의 유쾌하고 슬픈 사랑이야기는 예고편의 느낌 그대로였다. 장르가 몇 가지 혼합된 것처럼  느껴지는데, 황인호씨의 전작 '시실리 2km'를 생각하면 놀랄 일도 아니다.

입만 열면 하얀 거짓말이 줄줄이 나오는 어린 아리. 물론 사연이 있어서이지만 여러 가지 없는 말을 지어서하는 모습은 정말로 귀엽다.


S# 3. 학교. 1학년 교실(낮)

    정면을 바라보는 아리의 똘망똘망한 얼굴.
    의자를 세워두고 단상위에 올라선 아리, 자기소개를 하고 있다.

아리        내 이름은 아리야. 이아리.
              아리아리 동동할 때 아리를 생각하면 까먹지 않을 거야.
아이들         ...
아리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 봐.
아이들        ...
아리        왜 말이 없니? 반갑지 않니?
아이들        ...

...(중략)...

아리        반장, 니가 질문해.
반장        (쭈빗쭈빗) 우비는 왜 입어? 비도 안 오는데?
아리        (잠시 뜸을 들이다)...저주가 퍼지는 걸 막기 위해서야.
              난 저주받은 아이거든.

    뜨악하는 아이들.

아리        그래도 난 아무렇지도 않아. 암자엔 서정스님과 해구스님도 있거든.
             밤엔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부엉이도 볼 수 있어.
아리        내 몸에 손을 대면 너희들도 저주가 퍼질지 몰라.
여선생     (어떻게든 끊어보려는) 다했으면...이제 그만 들어가자...
철기        (아리에게) 저주가 뭐야?
아리        자전거 타다가 팔이 부러지는 게 저주야.
             산에 올라갔다가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도 저주구...
             나처럼...고아가 되는 것도 저주야.

    싸늘해지는 분위기...아이들 할 말을 잃는다.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오는 여선생.

아리        저주는 아주아주 무서운 거야.
             너희들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여선생    얘, 여기서 뭐하니?
아리       인사 했어요, 선생님.
             빈 자리 가서 앉으면 되나요?
여선생     (얼떨떨) 그..그래.

    아리, 빈자리를 향해 걸어가자 아이들, 주춤주춤 피한다.

...(중략)...

아리        넌 이름이 뭐니?
조강        차조강.

    미소 지으며 아리를 쳐다보는 조강.
    아리 쌀쌀맞은 눈으로 쳐다보며...책상 중간에 줄을 긋는다.

아리        넘어오면 알지?!
조강        (삐죽) ...

아리에게는 그녀를 지켜주는 친구 도마뱀 ‘티루카카 꾸루꾸루 칸타삐아 사우르스’가 있어서 다른 사람을 염려하는 그녀의 보호막이 된다.

S# 6. 느티나무 길 (낮)

    울창한 나무가 곧게 뻗은 아름다운 길.
    한 발짝 떨어져 나란히 걷는 아리와 조강...

아리        사람들이 왜 도마뱀을 싫어하는지 아니?
조강        몰라. 
아리        알려줄까?
조강        (끄덕끄덕) ...
아리        딴데 가서 얘기 하면 안돼.

    조강, 맹세를 한다는 뜻으로 가슴을 주먹으로 툭툭 치더니 입을 자크로 닫는 모션!
    아리, 쓰윽 눈치를 보다가 은밀하게 속삭인다.
 
아리        옛날 옛날에 도마뱀이 지구를 지배한 적이 있었다.
              그 뒤로 사람들은 도마뱀을 되게되게 싫어해.
              언제 또 지배할 지 모르니까 겁나는 거야.
조강        선생님도?
아리        당연하지.

    빠끔히 아리의 주머니 속 도마뱀을 들여다보는 조강.
 
조강        얜 이름이 뭔대? 
아리        티루카카 꾸루꾸루 칸타삐아 사우르스야.
조강        (멍한) ...
아리        어렵니?
조강        응.
아리        이름은 어려울수록 기억에 잘 남는 법이야.        
              김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삼천갑사동방삭, 치치카포사리사리센타,
              워리워리세프리캉, 무두셀라구름이, 허리케인의 담벼락 서생원의 고양이,
              바둑이는 돌돌이...라는 이름도 있잖아.

    멍한 조강...

아리        나 요새 티루카카꾸루꾸루칸타삐아사우르스한테 말을 가르치고 있어.
조강        정말?! (놀란 눈으로 도마뱀을 본다) 와!!!

... (중략)...

저주의 확산을 막아주는 우비도, 도마뱀도 소용이 없다는 걸 알게 된 어른이 된 아리는 다시 만난 조강에게 마음을 줄 수가 없다.

S# 30. 공양간 (밤)

    단스를 여는 아리. 위장된 그릇을 치우고 나면 밀봉된 작은 단지.
    단지를 꺼내 밀봉을 푸는 아리.
    빠알간 산딸기주를 사발에 담는 아리.

아리        산딸기주 못 먹어 봤지?
조강        우와...
아리        (사발을 올리며) 자...!

    이미 마시고 있는 조강, 꺼억....

아리        야..! 이거 독해!
조강        (눈이 풀린) 어... 온다...! 온다...!!
             너도 해봐.

    망설이다 사발을 원샷하는 아리.
    가만히 지켜보는 조강.

조강        오냐?
아리        (술기운이 올라오는) 어....온다...!! 떼로 온다!!

    <시간 경과>
    건배를 하고 원샷 하는 아리와 조강, 조금 취한 듯...

    <시간경과>

    조강의 손바닥 위에 달팽이...

조강        (쿡) 꼭 아리처럼 생겼다.
아리        너 달팽이 혓바닥에 올려놓을 수 있어?
조강        뭐하러 그런 짓을 해?   
아리        달팽이를 혓바닥에 올려놓으면 남자들한테 되게 좋대.
조강        뭐가 좋은데?
아리        변강쇠.
조강        (헉) 변강쇠?!
아리        (작은소리로) 요 아래 변강쇠 후손들이 살거든. 대대로 내려오는 비법이래.
             딴데 가서 얘기 하지마. 이거 퍼지면 우리나라 달팽이 멸종 돼.
             (손바닥 위에 달팽이가 없다) 어? 어디 갔지?

    씨익 웃는 조강, 혀를 날름 내밀면 혓바닥 위에 달팽이...
    설마 싶었던 아리, 으...몸서리를 친다.

    <시간경과>
     좀 취한 듯 혀가 꼬인 아리와 조강...

조강        땅이 올라와...
아리        (건배를 하며) 한잔 더 마시면 다시 내려가.

    취한 눈으로 도톰하고 예쁜 아리의 입술을 보는 조강.

조강        너, 그 저주 있잖아... 만지면 안 되는 저주... 요새도 그러니?
아리        요새도 그래.
조강        희한한 애네.
아리        희한한 애지.
조강        ...
아리        ...
조강        만약에...너랑 키스하고 팔 한 짝 부러진다면... 난 할 거다.
아리        ....
             나 이렇게 재수 없는 거 바이러스 때문일지도 몰라.
             에볼라바이러스보다 무서운 왕재수 바이러스.
             한 번 감염되면 죽을 때까지 혼자 놀아야 함. 
             백신은... 없음.
조강        (꾸벅꾸벅 졸고 있다) ...

성인이 되어도 저주는 계속되고 아리는 또 상처를 입고 그를 떠나지만 그를 잊은 것은 아니다.

S# 73. 아리 병실(밤)

    침대에 엎드려 다이어리를 여는 아리, 고교시절 조강의 사진이다.
    옆 침대에 앉아 책을 보는 척 하는 변자...미안한지 머뭇거리다...
    뭐라 말하려 하는데....

아리        (획 돌아보는) 변변자. 너 지금 되게 미안하지?
변자        ...

    자기 침대 쪽으로 오라고 손짓을 하는 아리.
    주춤대며 건너오는 변자.
    한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작은 랜턴으로 사진을 보는 변자와 아리.

아리        어때?
변자        남자친구?
아리        멋있지...?
변자        착하게 생겼다.
아리        얘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다 믿어.
             우리 동네에 화산이 있대두 믿고,
             귀신을 봤대두 믿고, 내가 외계...
변자        멀쩡하게 생겼는데 바보네.
아리        바보처럼 착해. 10년 동안 나만 기다리구...
변자        와~ 멋지다. 여깄는 거 알아요?
아리        ...
변자        한번 오라 그래... 친구 한명 데리구...큭큭...
아리        ...
변자        나두 보고 싶다.
아리        ...
변자        보고 싶지 않아요?
아리        ...
변자        ...언니?

    말없이 눈물을 흘리는 아리...

이쯤 되면 거짓말쟁이 아리를 용서해줘야 할 것 같다.



2. 조강의


조강이 영화에서 제일 매력적인 캐릭터라고 느껴졌는데, 아리에 비하면 평범한 사람이지만 열심히 아리에게 속아주고 아리만을 사랑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어릴 때 속는 모습은 나이에 어울려서 재미있기보다는 자연스러워보였는데, 나이가 들어서 여전히 그러는 것이 확실히 모자라보인다. 무조건적으로 바보같이 구는 것은 그녀가 좋기 때문이다. 아래씬을 보면 조강은 10년 만에 만난 그녀를 보고 한 눈에 반한다.

S#20. 시골 버스 정류장 / 기차역 (낮)

... (중략) ...
    <버스 정류장>
    아리, 앉았다 일어났다 서성인다...반복되는 기다림의 연속.

아리        (짜증난) 몇시야 벌써!

    <기차역 앞>

조강        (한숨쉬며) 벌써 1시 넘었는데...

    짐을 들고 일어나는 조강.
 
    <버스 정류장>
    빈 버스 정류장에 홀로 서 있는 아리.
    푸념 섞인 한숨을 내쉬며 돌아서는데
    탈탈탈탈.... 아리의 앞으로 지나가는 경운기.
    경운기 뒤에 멀뚱멀뚱 앉아 있는 조강...아리의 앞을 지나친다.
     ‘쟨가...?’하며 서로를 보는 아리와 조강 점점 멀어진다.
    긴가민가 하는 조강, 인사를 하고 경운기에서 뛰어내린다.
    머쓱한 얼굴로 쳐다보는 조강...
    아무래도 맞는 것 같은지 슬금슬금 다가온다.

조강        저..혹시 아리...?

    갑자기 인상이 험악해지는 아리, 불량소녀처럼 꼬라 본다.

아리        아리긴 뭘 아려?! 우쒸!!

    험악한 아리의 눈빛에 주눅이 드는 조강...

조강        (꾸벅) 죄송합니다...
아리        1시에 온대매!
조강        (돌아보는) 아리?
아리        지금 몇 시야?! 두시야! 두시!
조강        (어물어물) 아니...난 니가 기차역으로 나온다구...
아리        누..누가 나간다구 그래?
             내가 그렇게 한가해 보여?!
조강        (당황하는) 아니, 아니...그게 아니구...
             목욕...! 목욕하구 오느라구. 절에 목욕탕이 없잖아...
아리        (어이없다) 절에 목욕탕이 없어? 우리가 미개인이니?
             (목을 벅벅 긁으며) 봐라, 봐! 때 나와?! 봐!봐!!
조강        ...근데...
아리        근데 뭐!
조강        근데...너 되게 이뻐졌다...
   
조강은 10년만에 연락이 된 아리와 스님이 있는 절간에서 꿈결같은 시간을 보내지만 그녀는 또 연기처럼 사라진다. 8년이나 아리의 행적을 추적하지만 알아낼 수가 없고 첫사랑이 되버린 그녀를 그리워한다.

순수청년 조강은 스님 앞에서 기름을 붓고 라이터를 들기도 하고, 아리를 위해서 UFO를 부른다고 미스테리서클의 괴상한 모양을 밀밭에 그리기도하고, 그녀가 입원한 병원 앞에서 밤새 비를 맞기도 하고 정말로 힘을 다해 할 수 있는 한에서 사랑에 최선을 다한다.

S# 94. 연구소 현관 (낮)

    정문 앞에 와 서는 조강.
    철문 건너편에 서 있는 아리, 초췌한 몰골.
    아리와 조강, 슬픔을 누르고...미소...
    말없이 서있는 아리와 조강...
    꽃다발을 철장 사이로 내미는 조강.

아리        가시 있는 꽃 싫어.

    장미 한 송이를 뽑아 가시를 일일이 떼어내는 조강.
    가시를 떼어낸 장미를 내민다.
    그제야 받는 아리, 눈이 촉촉이 젖는다.

가시까지 떼가며 무조건적인 사랑을 바치는 조강은 그가 어린시절 아버지에게 ‘순정이 뭐야, 아빠’ 의 순정 그 자체다.

난 조강이 바보처럼 한 여자만 줄창 무식하게 사랑해서 좋았다.


S# 47. 호프집 (밤)

    마주 앉아 맥주를 마시는 조강과 준철.
... (중략) ...   

조강        니가 보기에도 이상하냐? 내가?
준철        뭐...이상하지는 않은데... 정상은 아니야.
조강        (그런가?) ...
준철        8년이면 자식아 지금 결혼해서 애가 둘이다.
             넌 스토커야!
조강        괴롭힌 적 없어!
준철        (버럭) 따라다니는 게 괴롭히는 거지!
             그 여자는 지금 8년 동안을 도망 다닌 거야!! 너 때문에! 어우 끔찍해...
... (중략) ...

그런 그에게 8년만에 아무렇지도 않게 나타나는 아리,

S# 49. 은행 안 (낮)

    자판기 컵이 툭 떨어진다.
    쪼로로 떨어지는 커피.
    커피가 다 담기자 커피잔을 빼들고 걸어가는 여자의 뒷모습.
    손에 든 자판기 커피를 통장 쟁반에 올려 놓는 여자.
    조강, 무심코 쟁반을 가져오면...김이 모락모락 나는 자판기 커피다.
    뭐야 하는 얼굴로 올려 보는 조강.
    무덤덤하게 서 있는 아리다...

아리        좀 있음 퇴근하지? 조기 앉아 기다릴게.
조강         (멍) ...

CUT TO.

    아무렇지도 않게 소파에 앉아 잡지를 보는 아리.
    불안한 지 아리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조강, 좌불안석이다.   
    아리, 잡지를 가지러 일어나자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조강.  
    아무래도 안 되겠는지 자신의 구두끈을 푼다.

CUT TO.

    구두끈을 두개로 엮어 아리의 발목을 소파에 묶는 조강.
    풀지 못하도록 매듭을 단단히 묶는다.

아리        뭐해?
조강        한 시간만 참아.

    그런 조강을 보는 아리, 어이가 없으면서도 가슴이 아린다.

참 유치하면서도 구두끈을 묶는 조강이 좋았다. 그는 지나가는 말로 은행원과 결혼하겠다는 아리의 말을 새겨듣고 정말로 은행원이 되었는데도 정작 아리는 기억도 못한다. 게다가 8년만에 나타나 8시간만 같이 있고는 미국으로 간다고 가버린다.


S# 55. 인천 국제공항 (낮)

    출국장으로 향하는 아리와 짐을 들고 침울한 얼굴로 따라가는 조강.
    안색이 안 좋다.

조강        얼굴이 안 좋아.
아리        잠을 못 잤어.

    아리, 백에서 루주를 꺼내 바닥에 금을 긋는다.

아리        여기까지야. 넘어 오지마.
조강        (서운한) ...

    잠시 서로를 보다가 짐을 넘겨주는 조강.
    아리, 눈으로 이별하고 돌아선다.
    아리가 가려하자 무심결에 금을 넘어가려는 조강.

아리        (돌아보며) 넘으면 끝이야!
조강        ...

    넘어가려던 발을 다시 들여놓는 조강. 자기 말을 너무나 잘 듣는 착한 남자다.
    아리, 밝게 웃고는 돌아간다.
    아리의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는 조강, 가슴이 쓰리다.
    아리가 인파 속으로 사라지자 금을 내려보는 조강... 축 처진 어깨로 돌아선다.
    숨어서 조강이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아리, 안색이 아주 안 좋다.


3. 마지막 거짓말

영화도 시나리오도 아리가 임상시험연구소에 입원하고부터 급격하게 긴장이 떨어지고 신파가 된다. 게다가 클라이막스 이후 아리의 병명이 밝혀지는 회상장면이 길어서 영화가 김이 새버린다. 시나리오에서 일반적으로 회상장면은 ‘독’과 같아서 꼭 필요할 때도 5씬을 넘지 않게 하는 것이 불문율이다. ‘도마뱀’에는 회상장면이 한 씬이지만 그 안에 세어보면 총10장면이 나온다. 왜 그랬을까.

결정적으로 이것저것을 다 떠나서 관객들이 화를 내는 장면은 이 영화의 가장 슬픈 클라이막스 때문이다. 대체로 아리가 우주선을 탔다고 생각하는 부류는 ‘이게 뭐야, SF도 아니고’ 식의 반응을 보인다. 그래서 심한 배신감에 분노와 허탈함을 느낀다.


물론 감독의 연출이 미숙했지만, 충분히 숨겨진 장면을 상상해 볼 수 있었을 텐데도 그들은 화를 낸다. 숨겨진 장면은 우주선이 내려온 것처럼 밀밭이 환하게 비춰진 가운데 돌아선 조강의 뒤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아리의 모습이다.


S# 103. 밀밭 중앙 (밤)

    힘없이 축 쳐진 아리를 미스터리 서클의 중앙에 눕히는 조강.
    옷을 벗어 아리를 덮어 주고 발전기로 달려간다.
    발전기에 씌운 천을 치우고, 힘껏 발전기를 돌린다.
    그리고 조심스레 스위치를 넣자...
    멀리서부터 하나 둘 켜지는 전구들.
    쏟아질 것 같은 별빛과 서클의 불빛이 장관을 이룬다.
    눈가가 촉촉이 젖는 아리, 잔잔하게 일렁인다...
    오한이 오는 아리, 파르르 떤다.
   
조강        많이 추워?
아리        (덜덜 떠는) ...
조강        불 피울게.
아리        (떨며) 서클 다 태우려구?

    조강, 안타까운 얼굴로 아리를 꼬옥 안아준다.

아리        그때도 추웠어. 도마뱀 잡는다구 논두렁 다 헤집고... 되게도 추웠는데...
조강        (아리의 몸을 비비며) 어때? 좀 낫지?
아리        바보야, 열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가는 거야.
             지금 내가 열이 나니까 내 열이 너한테 가는 거라구.
             (안으며) 따뜻하지?
조강        (가슴이 아프다) 따뜻하다...난로 같애.
아리        그때두... 너하구 살이 닿았을 때...
             너 열이 얼마나 나는지 난로 같았어.
             되게 따뜻하더라. 
             그때 받았으니까... 이젠 돌려 줘야지.

    바람이 불자 밀밭의 밀들이 아름답게 일렁인다.
    점점 호흡이 평온해 지는 아리.

아리        나 졸린다...
조강        아리야...자면 안돼. 아리야!
아리        ...
조강        조금만 참어! 이제 올 건 데 자면 어떡해?!
아리        (눈이 감기는) ...
조강        오고 있잖아...외계인이 뭐 이래! 조금만 참자 엉?
아리        꼭 애 같다..
조강        (울컥...치미는) 니 친구들 온다며! 느꼈다며!!        ·            지금 자면 안되지!

    힘겹게 오한을 참아내는 아리.

조강        온다...! 올 거야! 조금만 참아...
             (일어서는) 불빛을 못봤나 봐... 이 멍청이들!!
아리        (눈물) ... 그 말을 믿었니...바보...

    아리를 조심스레 기대 놓고 서클 한쪽에 세워 둔 자전거에 올라타는 조강.
    서클의 불빛을 따라 원을 그리며 빠르게 패달을 밟는다.
    자전거의 뒤로 송신기와 위성 안테나가 달려 있다.
    불빛을 따라 거대한 원을 자전거로 빙빙 도는 조강.
    아리를 위해 미친 듯이 패달을 밟는다.

아리        미안해...
조강        아리야!! 사랑해! 사랑해! 사랑한다구!!!

    중앙에 앉아 조강을 바라보는 아리, 하염없이 눈물이 흐른다.

아리        미안해...미안해...
             널...내가 널...널...어쩌면 좋니...
             미안해...

    아리... 점점 눈이 감긴다.

아리        조강아... 나, 힘들어...

    자전거에서 급하게 뛰어 내려 달려오는 조강.
     
조강        아리야!! 아리야!!
아리        (힘없는) 거기가 금이야...
              더 이상 넘어오면 끝이야...

    멈칫 서는 조강.

조강        내가 바보냐! 맨 날 니 말만 듣게!

    조강, 발을 내딛는다.
    밀밭의 전구가 끊어질 듯...끊어질 듯...약하게 점멸 거린다.
    당황하는 조강, 아리를 본다.
    사아악....밀밭으로 부는 바람...아리의 머리칼을 흩날린다.

아리        오나봐...
조강        ?!
아리        돌아서. 니가 보면 갈 수 없을 거야.
조강        ...
아리        (간절히) 차조강....

    아리의 마음을 읽었는지 돌아서는 조강...
    갑자기 하늘 위에서 강렬한 빛이 아리를 비춘다.
    모든 것을 태울 것 같던 강한 빛....!!

아리        안 기다릴 거지?
조강        안 기다려! 너 여기 오면 아프잖아!
아리        안녕...
조강        (복받치는) 가지마...제발...
아리        나 사랑하니...?
조강        사랑해...
아리        보내 줄 거지...?
조강        ...보내 줄게...
아리        사랑해...
       
    강한 빛 속으로 사라지는 아리.
    뒤돌아서는 조강, 눈을 감는다.


‘아리조강납치사건’에서는 CIA요원이 쫓아오고 정말 우주선이 뜨는데 그것이 영화촬영장면이라는 반전으로 처리된다. 그래서 단 한사람 조강을 성공적으로 속인다. 103씬 ‘도마뱀’의 클라이막스를 읽으며 각자 판단하길 바란다. 아리의 최후가 어땠는지...

아리는 마지막까지 ‘그 말을 믿었니... 바보’라며 분명히 현실과 판타지 사이에 금을 긋는다. 그 금을 넘으면 진짜로 아리의 미움을 사는데도 관객은 금을 넘어버린다. 그리고는 죽어가는 아리를 보지 못하고 조강을 위해서 거짓말해온 그녀를 외면한다.

그가 슬퍼할까봐 끝없이 거짓말하며 도망 다니던 아리와.. 끝까지 그녀에게 속아주고 한없이 그녀를 기다려준 조강을 생각하면...... 또 환타지 뒤로 무책임하게 숨어버린 감독과 냉정하게 돌아서는 관객을 생각하면 정말로 가슴이 아프다.



감독 : 강지은 / 각본 : 황인호
 


** 이글은 제가 온라인 영화비평 네오이마주 [시나리오 읽어주는 여자] 칼럼에 2006년 5월에 게재한 바 있습니다. **